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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 [南延君]

호사도요 2014. 4. 8. 14:21

남연군 [南延君]

 

본관은 전주. 성은 이(李), 이름은 구(球)이다.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麟平大君)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병원(秉源)이다.

흥선대원군 하응(昰應)의 아버지이다.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서자인 은신군(恩信君)에게 입양된 뒤 남연군에 봉해졌다.

1815년(순조 15) 수원관(守園官), 1821년 수릉관(守陵官)을 지냈고, 죽은 뒤 충청도 덕산(德山)에 묻혔다.

1868년(고종 5) 2회에 걸쳐 우리나라에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시신을 담보로

통상을 강요하기 위해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했다.

이 만행으로 국내의 반서양의식과 흥선대원군의 쇄국주의가 더욱 굳어지게 되고, 천주교도들은 엄중한 단속을 받게

되었다.

순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처음 시호는 영희(榮僖)였으나, 뒤에 충정(忠正)으로 바뀌었다.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고덕면·덕산면·봉산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

백제의 마시산군(馬尸山郡)으로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 이산군(伊山郡)으로 고쳐 웅주(熊州:공주)

관하에 두었다.

이때 영현으로 금무현(今武縣)·목우현(目牛縣)을 관장했다.

고려시대에는 1018년(현종 9) 홍주(洪州:지금의 충남 홍성군)의 속현이 되었다가 후에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다.

조선초인 1405년(태종 5) 덕풍현(德豊縣:백제의 今勿縣, 757년 今武縣으로, 940년 덕풍현으로 개칭, 1018년 홍주

속현이 되었다가 1175년 감무를 두었음)을 병합하여 덕산으로 이름을 바꾸고, 1413년(태종 13) 현을 설치했다.

1828년(순조 28) 군으로 승격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홍주부, 1896년에 충청남도 소속 덕산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하여 비입지(飛入地)인 비방곶면이 면천군으로, 설현우현이 해미군으로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현내면·나박소면을 덕산면으로, 대덕산면·대조지면·장촌면을 삽교면으로, 도용면·고현내면·거등면·고산면을 고덕면으로, 내야면·외야면을 봉산면으로 통합하여 예산군에 병합하고, 덕산군은 폐지했다.

덕숭산 수덕사와 보부상 집단인 예덕상무사의 유물들이 남아 있으며, 1868년(고종 5) 독일인 오페르트가 구만포로 들어와 가야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고 민가를 약탈한 사건으로 주목을 받았던 곳이다

 

불타는 가야사 (남연군묘)

 

흥선군 주위에 여러 한량들이 모여들었는데 정만인이라는 지관이 찾아와 말하기를 충청도 덕산땅에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있고 또 가야산 동쪽 덕산에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자리가 있으니 둘 중 한곳에 선친의 묘를 쓰라는 것이었다. 흥선군은 물론 후자를 택했다.

그런데 황제가 나올 자리란 평범한 산비탈이 아니라 가야산의 유서깊은 거찰 가야사의 보웅전앞에 있는 금탑 자리라는 것이었다

흥선군은 이절을 폐사시키고 꼭 그 자리에 묘를 쓸 요량으로 먼저 가야산 아래쪽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절골에 임시묘자리를 정했다.

그후 흥선군은 가야사의 중들을 내쫓아 빈집을 만든다음 불을 질러 폐사시켜버리는데 매천야록에서는 흥선군이 재산을

처분한 이만냥의 반을 주지에게 주어 불을 지르게 했다고 하고 박흥식씨는 흥선군이 가보로 내려오는 단계벼루를 충청감사에게 뇌물로 주고 중들을 쫓아내게 한 다음 불을 질렀다고 한다

이리하여 가야사는 불타버리고 금탑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폐사지가 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금탑을 부수고 묘를 파는 일이었다

흥선군 4형제는 그일을 이틑날로 미루고 잠을 자는데 세형이 모두 똑같은 꿈을 꾸었다

흰옷을 입은 늙은이가 노해서 욕설을 늘어 놓으며 나는 탑신이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내거처를 빼앗느냐? 끝내 장사를 지낸다면 4형제가 폭사할테니 빨리 돌아가라 이말을 들은 흥선군은

떨기는커녕 오히려 흥분하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진정 명당자리입니다.

명이란 타고난 것인데 신이 죽으라고 빈대서 죽겠습니까?

종실이 쇠퇴하여 우리 형제들은 장동 김씨 문전에서 옷자락 끌며 얻어먹으면서 구차한 삶을 바라느니 차라리 일시에

크게 일어서는 것이 좋지않겠습니까?

형님들은 모두 자식이라도 있으나 하나의 핏덩이도 없는 것은 오직 나 뿐 입니다 죽는다고 두려울 것하나 없으니 쓸데없는 말 하지 마시오

이른 아침 탑을 깨트리고 보니 그 자리는 전체가 돌이었다

도끼로 깨뜨리니 도끼가 튀기만 한다 흥선군은 도끼를 치켜들고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나라고 왜 왕의 아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인가? 그러자 다시 도끼는 튀지 않았다 한다.

탑을 쓰러뜨리니 그속에 백자 두 개와 단다 두병 사리구슬 세알이 있었다 한다

사리구슬은 머리통만 하여 밝게 비쳐 물에 침수되어도 푸른 기운이 물을 뚫고 번쩍번쩍 빛났다

매장를 마치고 난후 흥선군은 나중에 누가 손댈까 염려되어 철 수만근을 녹여 부었고 그 위에 강회를 비벼서 다졌다고 한다.

 

오페르트 일당이 밤새 도굴하다 실패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남연군의 묘를 쓴후 흥선군은 실제로 대원군이 되었다

아들은 고종황제, 손자는 순종황제가 되었으니 별볼일 없는 황제라도 정만인의 예언이 맞은 셈이다

옛날 가야산의 금탑자리.지금 남연군의 묘가 명당자리 인지를 가려낼 눈은 내겐 없다

그곳이 양택으로 좋은지 음택으로 좋은지도 모른다.

다만 명당의 조건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거의 모범답안처럼 펼쳐져 조산.주산 안산 좌청룡 우백호가 이렇게 완연히

드러나는곳을 보기 쉽지 않다 엇핏 보기에 좌청룡쪽 산세가 너무 험악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 때문에 계곡 아래쪽

에는 석조보살상을 세워 그 기세를 누그려 뜨렸다고 한다.

오직 흠이 있다면 주산에서 명당으로 흐르는 지맥이 생각보다 짧다.

그래서 정만인은 만대가 아니라 2대의 천자가 나온다고.........//

 

남연군 분묘 도굴사건 [南延君墳墓盜堀事件]

 

오페르트는 중국 상하이[上海]를 근거로 활동하던 유태계 독일상인으로 1866년 2번에 걸쳐 통상요구를 하다가 거절

당했다.

그러자 그해에 미국인 젱킨스의 지원을 받아 통상조약 체결을 명분으로 상하이에서 조선을 향해 출발했다.

이때 통역으로 프랑스 선교사 1명과 한국인 천주교도 약간 명을 대동했다.

그러나 이들은 통상요구는 하지 않고 4월 18일 밤에 충청도 홍성군(洪城郡) 구만포(九萬浦)에 몰래 상륙해 바로 덕산

으로 이동했으며, 덕산군청을 습격한 후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쳤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들은 조선인이 시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관을 미끼로 조약을 체결하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중도에 날이 밝아 도굴은 실패했다.

21일에 이들은 영종진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수비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사상자를 내고 달아났다.

이 사건은 국외에도 널리 알려져 젱킨스가 기소되는 등(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남) 많은 파문을 일으켰으며, 대원군이 천주교탄압령을 내리고 대외강경책을 더욱 고수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페르트는 이 사건 이후 〈조선기행 A Forbidden Land:Voyage to the Corea〉이라는 기록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