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지혜

배려하고존중하는사람들.

호사도요 2010. 11. 5. 14:40

■ 增內(아내에게) ■ 
 
             
生爲同室親  [생위동실친]
死爲同穴塵  [사위동혈진]
他人尙想勉  [타인상상면]
而況我與君  [이황아여군]

살아서는 한 방에서 사랑하고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히리라
다른 사람도 부부의 도를 지키는데 
하물며 그대와 나는 더 할 나위 있겠는가?


黔婁固窮士  [검루고궁사]
妻賢忘其貧  [처현망기빈]
沂缺一農夫  [기결일농부]
妻敬儼如賓  [처경엄여빈]
 
검루는 가난한 선비였으나
현명한 처는 가난을 잊었고
기결은 한낱 농부였으나
처는 그를 귀빈처럼 공경했고


陶潛不營生  [도잠불영생]
翟氏自찬薪  [적씨자찬신]
梁鴻不肯仕  [양홍불긍사]
孟光甘布裙 [맹광감포군]

도연명은 생계를 못 꾸렸으나
부인 적씨는 스스로 살림 꾸렸고
양흥은 벼슬살이 물리쳤으나
그의 처 맹광은 베옷에 만족했네


君雖不讀書  [군수불독서]
此事耳亦聞  [차사이역문]
至此千載後 [지차천재후]
傳是何如人  [전시하여인]

그대 비록 책은 읽지 못했어도
귀로는 들어 알고 있으리라
천년이 지난 오늘에 
그들이 어떠한 사람이라 전하는가를


人生未死間  [인생미사간]
不能忘其身  [불능망기신]
所須者衣食  [소수자의식]
不過飽與溫 [불과포여온]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있는 동안은
육신의 존재를 잊을 수는 없어
배를 채우고 몸을 가리기 위해
먹고 입어야 하지만


蔬食足充饑  [소식족충기]
何必膏梁珍  [하필고량진]
繒絮足禦寒 [증서족어한]
何必錦繡文  [하필금수문]

배 고픔은 나물로 때우면 그만이지
어찌 기름진 음식만 필요하며,
거친 솜옷으로 추위만 막으면 되지
어찌 비단 옷에 무늬가 필요하겠는가


君家有貽訓  [군가유이훈]
淸白遺子孫  [청백유자손]
我亦貞苦士  [아역정고사]
與君新結婚  [여군신결혼]

그대 집에 내려오는 가르침에도
청렴결백을 자손에게 전하라 하였으니
나 또한 고지식한 선비로서
그대와 부부가된 이상에는


庶保貧與素  [서보빈여소]
偕老同欣欣  [해로동흔흔]

모쪼록 가난과 소박함을 지키어
기쁜 마음으로 부부 해로하리라


■ 백거이(白居易, 772 - 846) ■

중국 중당기(中唐期)의 시인.

자 낙천(樂天). 호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본적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

낙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 출생.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으며, 같은 시대의 한유(韓愈)와 더불어‘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병칭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 때부터 시짓는 법을 배웠으며 15세가 지나자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재를 보였다.

대대로 가난한 관리 집안에 태어났으나, 800년 29세로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32세에 황제의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유명하다.

807년 36세로 한림학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좌습유(左拾遺)가 되어 유교적 이상주의의 입장에서 정치 ·사회의 결함을 비판하는 일군의 작품을 계속 써냈다.

[신악부(新樂府) 50수](805)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811년 40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에 어린 딸마저 잃자 인생에 있어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814년 태자 좌찬선태부(左贊善太夫)에 임용되었으나, 이듬해에 일찍이 사회를 비판하는 그의 시가의 대상이 되었던 고급관료들의 반감을 사서 주장[九江]의 사마(司馬)로 좌천되었다.

그 곳에서 인생에 대한 회의와 문학에 대한 반성을 거쳐 명시 [비파행(琵琶行)](816)을 지었다.

818년 충주자사(忠州刺史)가 되었으며, 임기를 마치고 장안(長安)에 돌아오자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를 피하기 위하여 822년 자진해서 항주자사(杭州刺史)가 되었다.

항저우의 아름다운 풍광(風光)에 촉발되어 시작(詩作)은 계속되었고, 문학적 지기(知己)로서 트고 지내던 원진(元拂)과 만나게 되어 그것을 계기로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50권, 824)을 편집하였다.

825년 소주자사(蘇州刺史)로 전임하였으나 827년에는 중앙으로 불리어 비서감(秘書監)에 임명되었다.

829년 58세가 되던 해 뤄양에 영주하기로 결심, 하남부(河南府)의 장관이 되었던 때도 있었으나 대개 태자보도관(太子補導官)이라는 명목만의 직책에 자족하면서시와 술과 거문고를 삼우(三友)로 삼아 ‘취음선생’이란 호를 쓰며 유유자적하는 나날을 보냈다.

831년 원진 등 옛친구들이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황혼을 의식하고 뤄양 교외의 용문(龍門)의 여러 절을 자주 찾았고 그 곳 향산사(香山寺)를 보수 복원하여 ‘향산거사’라는 호를 쓰며 불교로 기울어졌다.

이에, 문학에 대한 충동도 번뇌로 보여서 참회하는 입장에서 ‘광언기어(狂言綺語)’의 문집인 [유백창화집(劉白唱和集)] 5권, [백씨문집(白氏文集)] 60권을, 다시 65권, 67권을 834∼839년에 걸쳐 마음의 증표로서 연고 있는 사찰에 봉납하였다.

842년 71세 때 형부상서(刑部尙書)의 대우로 퇴직하였는데,

[백씨문집]은 70권에 이르렀다.

그 뒤로도 ‘광영(狂詠)’은 계속되었고 정부의 불교탄압정책을 풍자하는 작품을 통해서 자기 시대의 종말을 예감하고 인생의 마무리로서 75권의 전집을 편정(編定),

그것이 완성된 이듬해 그 생애를 마쳤다.

이 밖에 시문(詩文)을 짓는 편의를 위해서 고사성어를 모은 [백씨육첩사류집(白氏六帖事類集)] 30권도 있다.

그 긴 생애 동안에 그의 문학은 자주 변모하였다.

즉, 젊은 날의 낭만주의적인 경향은 지적인 빛을 띠며 이상주의적 입장으로 옮겨갔고,문학의 존재의의를 주장하며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다가 이윽고 정치나 사회 가운데서 개인을 발견하여 자기의 내면을 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다시 개인에 비추어 널리 인간의 생활자세를 추구하여 인생의 지혜를 표상하는 문학을 지향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정형(定型)의 한계적 조건하에서 언어의 온갖 기능을 다 구사하는 ‘창화(唱和)’라는

새로운 형태의 창조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항상 그 속에 일관하고 있던 것은, 문학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며 생활의식이나 생활감정이 뒷밤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었다.

따라서 제재는 경험적이고 언어는 일상성을 띠며, 발상은 심리의 자연에 따르고, 구성은 논리의 필연에 따르며, 주제는 보편적이어서 ‘유려평이(流麗平易)’한 문학의 폭을 넓혀 당(唐) 일대(一代)를 통하여 두드러진 개성을 형성하였다.

그의 생존시에 이미 그의 시는 민중 속에 파고들어, 소치는 아이나 말몰이꾼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리고,

배나 절의 기둥이나 벽에 써붙여지기도 하였으며, 멀리 외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시는 한국에서도 일찍부터 전해져 널리 애송되었다.

현재 전하는 것은 [백씨장경집] 75권 가운데 71권이 있고, [백향산시집] 40권도 있다.

현존하는 작품수는 3,800여 수이고, 그 중에서 [비파행(琵琶行)] [장한가(長恨歌)] [유오진사시(遊悟眞寺詩)]는 불멸의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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