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결혼풍속도 (그들의 고정관념)
[신랑·신부·혼주 1200명 조사]
젊은이 한 쌍 결혼하는 데 남자는 7545만원, 여자는 5226만원 든다.
이후 아이 하나 낳아 대학까지 졸업시키려면 3억896만원이 또 들어간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작년 이후 내놓은 통계이다.
본지는 지난 2012년 '부모의 눈물로 울리는 웨딩마치' 연중 기획을 통해 우리 사회의 허례허식을 걷어내고 '작은 결혼식' 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갈 길은 아직 멀다.
취재팀이 조사 회사 메트릭스와 함께 부모에게 기댈 수 없는 젊은이들을 인터뷰했다.
한 가정을 일구겠다는 꿈으로 들떠야 할 젊은이들 목소리에서 '박탈감'이 진하게 묻어났다.
◇첫 번째 선택
"한 친구가 남자친구와 잘 사귀다, 집에 한번 가보고 바로 헤어졌어요.
온 가족이 반지하 다세대 주택에 살더래요.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정들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 했어요.
그때 친구는 25세였어요."
◇두 번째 선택
내년에 결혼하기로 날 잡은 다른 친구가 있다. 상대는 장손이다. 홀시아버지를 한집에 살며 모셔야 한다.
서씨가 "괜찮겠냐"고 묻자, 친구는 자신 있게 "감수할 수 있다"고 했다.
시아버지가 재산이 많다면서 그게 자기한테 올 거라고 했다. "능력 있는 남자보다 아버지가 부자인 남자가 이상형이었다"고도 했다. 놀랐다. "그런 걸 생각하고 실행하고 입 밖에 낸다는 게….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했을 뿐 유별나게 약은 애도 아니었어요."
◇눈덩이가 굴러간다
또 다른 친구는 최근 아이가 생겨 갑자기 날을 잡았다. 남자친구와 둘이서 가진 돈 털어 아무것도 없이 시작할 생각이었다.
집도 세간살이도 공평하게 돈 내서 마련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태도를 바꿔 "전셋집을 마련해주겠다"고 했다.
꼭 잘된 게 아니었다.
"집을 구해주신 건 고맙지만, '집을 해줬으니 채우는 건 네가 하라'고 하셔서….
집안이 어려운 친구인데, 남들처럼 예물·예단 보내느라 오히려 처음 계획보다 돈을 더 쓰게 됐어요."
이런 얘기 들으면서 서씨도 자꾸 생각이 많아졌다.
◇"단칸방 얘기, 저희한텐 안 통해요"
서씨는 지방 출신이다. 대학 시절 기숙사에 살다가 졸업 직전 대학생 전세대출을 받았다.
정부가 전세금 7000만원을 집주인에게 대신 내주고, 서씨는 나라에 이자만 낸다.
2% 저리(低利)지만 2년 만기다. "집 구할 일이 막막하죠." 고향에 돌아갈 생각은 없다.
일자리는 서울에 더 많이 있다.
부모 세대는 "우리 땐 단칸방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기 딸에게 "그러니까 너도 단칸방 사는 남자와 결혼하라"는 엄마는 없다.
서씨가 "성공한 사람들이 TV에 나와서 '고생 끝에 이만큼 됐다'고 하는데, 그분들은 성공했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고 했다. "지금은 달라요. 어렵게 출발하면 자기 힘으론 못 올라가요.
계속 고만고만한 삶을 반복해요. 안정되고 싶어서 결혼하는 건데…. 결혼해서 굳이 지금보다 힘들게 살고 싶진 않아요."
[신랑·신부·혼주 1200명 조사… 그들의 고정관념]
신랑측, 집 부담에 짓눌리고 - "신부가 더 넉넉해도 남자 몫"
신부측, 예단에 허리 휘고 - 사돈 눈치에 "무리해서라도…"
양가 모두 축의금만 쳐다봐 - "뿌린만큼 악착같이 회수하자"
여성가족부가 전국 신랑·신부와 혼주 1200명을 조사한 결과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남들처럼'이었다.
신혼집이건, 예물·예단이건, 결혼식이건 '관행대로 하는 게 좋다'는 심리가 뚜렷했다.
그에 따라 결혼 과정을 힘들게 만드는 '고정관념 3종 세트'가 나타났다.
응답자 열 명 중 여섯 명이
'신혼집은 남자가 해와야 한다'(62.8%)고 했다.
응답자 열 명 중 네 명이 '예단은 남들만큼 주고받아야 한다'(44.6%)고 했다.
'결혼식에 친척과 친구만 오면 초라해 보인다'(50.9%)는 사람이 과반수였다.
이 세 가지 고정관념은 따로따로 작동하지 않았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부추기면서 눈덩이처럼 일을 키웠다.
신랑 부모가 신혼집 구해주는 부담에 짓눌리고→신부 부모가 돈 많이 쓴 사돈댁 눈치를 보느라 무리해서 예단을 보내고→양가 모두 결혼 비용 부담에 짓눌리다 보니 그동안 축의금 낸 만큼 돌려받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지는 구도였다.
내년 3월 아들을 결혼시키는 박순덕(가명·56)씨는 "10을 주면 10을 받아야 하는 게 사람 심리 아니냐"고 했다.
◇"나도 받아야겠다"
박씨는 IMF 외환위기 때 남편 사업이 망해 부부 모두 신용불량자가 됐다. 이후 남편은 경비, 본인은 식당 종업원으로 일해 외아들(30)을 키웠다. 아들이 중소기업에 취직한 뒤 "너도 이제 결혼할 사람 만나라"고 했다. 작년에 아들이 정말로 며느릿감을 데려오자, 속으로 겁이 났다. 방 두 칸짜리 역세권 전셋집이 1억3000만원쯤 했다. 아들 저축은 2000만원이 전부였다. 아들이 엄마에게 "얼마나 보태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박씨 부부는 둘이 합쳐 1년에 3000만원 좀 넘게 번다.
아들 커플의 수입은 5000만원 정도다.
아들 커플이 더 벌지만, 결혼 비용 부담은 당사자인 아들 커플보다 박씨 부부가 오히려 무겁게 느끼는 것 같았다.
박씨가 예비 며느리에게 슬쩍 "집값 좀 보탰으면 좋겠다"고 운을 뗐다.
초조하게 상대방 반응을 기다렸지만, 예비사돈 댁에선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박씨는 "이쪽 사정을 몰라주는 게 정말로 섭섭하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우리 집에서 그동안 모은 돈을 탈탈 털어 7000만원을 보태주고, 나머지는 아들이 대출받기로 했어요.
저도 예물·예단을 최소한 2000만원은 받아야겠어요."
◇거래의 끝
이런 고정관념이 쌓이면 결혼이 '거래'처럼 변질된다.
그러다 결국 파국을 맞은 사람이 명문대 출신 회사원 송정인(가명·29)씨였다.
송씨는 3년 사귄 남자친구와 작년 9월 결혼식을 올리기로 날을 잡았다.
예비 시댁에서 "어차피 유학도 가야 하니까, 신혼집 따로 구하지 말고 시댁에 들어와 함께 살자"고 했다.
남자친구가 아직 수입이 없어, 내키지 않지만 그 말에 따르려 했다.
막상 날을 잡자 남자친구 어머니가 하나둘씩 혼수를 요구했다.
처음엔 "우리 집 냉장고가 낡았으니 네가 하나 사오라"고 했다.
다음에 만났을 땐 "텔레비전·세탁기·주방용품 정도는 해오라"고 했다.
막판엔 "너희 부부에게 안방을 내주고 우리 부부는 작은 방으로 옮길 테니 침대를 사오라"고 했다.
◇"해주지도 않으면서"
송씨를 정말로 괴롭힌 건 물질적인 요구 그 자체가 아니었다.
"왜 나만 손해를 봐야 하느냐"는 억울함이 더 심했다.
"남자친구 부모님이 딱히 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어요.
강북이지만 서울 시내 40평대 아파트에 사셨고, 장차 남자친구가 유학 가면 비용도 대주겠다고 했어요.
신혼집은 안 해주면서 요구하니까…."
송씨는 '내가 남자보다 수입이 많아도 집은 남자가 해오는 게 당연하다.
집을 해오지 않으려면 혼수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남자친구에게 얘기하자, 남자친구는 되레 "우리 누나는 결혼할 때 시댁에 현금 3000만원을 가져갔다"며 자기 부모를
편들었다.
두 사람은 결혼식 석 달 전 파혼했다.
송씨는 올가을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지난번 남자친구와 달리, 이번엔 남편이 본인 돈과 부모 돈을 합쳐서 1억4000만원짜리 전세 아파트를 해왔다.
집·예물·혼수 비용 둘러싸고 결혼식 이후에도 兩家 감정싸움
임용고시 준비생 이선미(가명·32)씨. 3년차 지방 공무원인 남자 친구와 수십 번 싸우고 올봄에 결혼했다.
싸움의 원인은 주로 돈이었다.
신혼집 구하면서 싸우고, 신랑 집에 예단 보내면서 싸우고, 예단으로 보낸 돈 중 얼마를 돌려받느냐를 놓고 다시 싸웠다.
"신랑이 '되도록 작은 집을 얻자'고 하길래 제가 '서울도 아니고 지방인데…. 방 세 개는 되어야 한다'고 했어요.
저희 둘이 1500만원을 대출받고 시부모님이 5000만원을 보태줘서 제 뜻대로 했어요."
주위에서 "요샌 보통 집값의 10%를 현금으로 시댁에 보낸다"고 했다.
이씨는 500만원만 보내려다 1000만원을 보냈다.
시부모가 "300만원만 돌려주겠다"고 해서 양가가 한바탕 했다.
감정이 쌓이자 이어지는 과정도 계속 꼬였다.
시부모가 "다른 예물은 됐고, 유기 세트를 갖고 싶다"고 했다.
예단 때문에 한차례 다툰 뒤라 평범한 유기 대신 무형문화재 장인이 만든 유기를 사 보냈다. 그러면서 슬슬 오기가 생겼다.
유기를 보내면서 신랑에게 "요샌 다들 명품 가방 하나씩 들고 다니더라"고 했다.
시부모가 그 말을 전해듣고 명품 가방을 사주면서 "네가 이런 거 바라는 아이인 줄 몰랐다"고 한마디했다.
이런 식으로 양가가 집값 빼고도 예물·예단·혼수로 8000만원을 썼다. 그중 신랑·신부가 모은 돈은 2500만원이 채 안 된다.
통계청은 27일 "올 들어 8월까지 결혼 건수(20만1200건)가 2005년 이후 가장 적었다"고 발표했다.
경기 부진, 취업난 등으로 돈 없어 결혼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본지가 여성가족부와 함께 전국 신랑·신부 600명과 혼주 600명 등 총 1200명을 조사해보니 큰돈 들여 무리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그 결과 양가 모두 두고두고 후유증을 겪는 악습(惡習)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두 가지 현상이 특히 두드러졌다.
무엇보다 다 큰 자식이 은퇴를 전후한 부모에게 기대는 관행이 당연한 것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부모가 능력 있으면 대줘야 한다”는 응답이 신랑·신부(64.8%)보다 혼주들(84.6%) 사이에서 더 많이 나왔다.
신랑·신부가 부모 도움 없이 자기 힘으로 결혼했다는 응답은 열 명 중 한 명에 불과했다(10.4%). 세 명 중 한 명이 “전체 결혼 비용중 60% 이상을 양가 부모가 댔다”고 했다(33.5%).
머리로는 ‘우리 결혼 문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면 자신이 비판해온 그 행동을 똑같이 하는 현상도 뚜렷했다. 응답자 과반수가 “이상적인 결혼 비용은 집값 빼고 3000만원 미만”이라고 했는데(57.2%), 실제로 그만큼만 썼다는 사람은 다섯 명 중 한 명이 채 안 됐다(20.9%). 응답자 대다수가 “결혼 비용은 양가가 공평하게 내야 한다”면서도(68.2%) “그래도 신혼집은 남자가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62.8%).
신산철 생활개혁실천협의회 사무총장은 “말로는 ‘간소하게 하자’고 하면서도 자기 일이 되면 체면과 과시욕에 끌려가는 게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했다.
자료:조선일보.여성가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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