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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明堂)은 덕(德)을 쌓아야 얻어진다

호사도요 2013. 12. 25. 09:54

명당(明堂)은 덕(德)을 쌓아야 얻어진다

 

공주시 공주대교 북쪽 금강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全義李氏先山이라고 푯말이 있는 묘가 있다.

천장지비(天藏地秘)한 명당으로 전의 이씨가 이묘의 음덕으로 명문의 집안이 되였다는 전설이 있다.

금강변에 가난한 뱃사공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친절하게 손님을 모셨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뱃삯을 받지 않고 건네주어 자비롭다는 소문이 나있었다.

뿐만 아니라 공주 부근의 가난한 거지들을 잘 보살펴주어 존경을 받았고 아버지처럼 따랐다.

어느 날 떠돌이 중이 와서 급히 강을 건너자고 했다.

사공은 급한 볼일이 있나 싶어 급히 강을 건너 주었다.

그런데 스님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건너자고 했다.

사공은 아무런 말없이 다시 건네주었다.

그러자 또 다시 건네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사공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웃으면서 건네주었다.

이러기를 수차례 반복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크게 감탄하고 사공의 얼굴을 살핀 다음 갑자기

"보아하니 喪中인 것 같은데 묘 자리는 보아둔 게 있소?"라고 물었다.

사공은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3년이 다가오는데 아직 좋은 자리를 찾지 못해 임시로 매장해두었다”고 하였다.

스님은 자기가 좋은 자리를 일러줄 테니 꼭 그대로 시행해야 한다고 다짐을 하면서 산중턱으로 올라갔다.

한자리를 일러주고는 이곳은 명당자리로 묘를 이장하자마자 삼한통일에 크게 기여할 인물이 나오고 또 훗날에 반드시

묘를 이장하자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니 아주 파지못하도록 석회 1천포를 써 단단히 묻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글을 써주며 돌에 새겨 함께 묻으라고 했다.

사공은 거지들의 협력을 얻어 스님이 시키는 대로 아버지 무덤을 이장하였다.

스님의 말대로 무덤을 쓴 뒤 부귀영달이 뒤따라 자손이 번창 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사공의 아들인 이도(李棹)는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치기 위해서 이곳에 왔는데 마침 장마철이라 강을 건널 수가 없어 진군이 늦어졌는데 배를 만들고 직접 노를 저어 왕건이 무사히 공주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공로로 그는 三韓太師라는 높은 벼슬을 하였고 도(棹)라는 이름도 하사 받게 되었으며 전의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렇게 몇 대가 지난 뒤였다.

당시 풍수지리로 유명한 박상래라는 지관이 이곳에 찾아와 묘 자리를 본 뒤

"이 자리는 산 뒤의 맥이 내려오다가 끊겨서 일시 발복할지는 모르나 몇 대가 지나면 일족이 망할 나쁜 자리이니 즉시

이장해야 한다." 하였다.

후손들은 박상래의 명성을 들었고 또 말도 그럴 듯하여 박상래가 잡아준 곳으로 이장을 하기로 하고 묘를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석회로 단단히 묻어서 좀처럼 파기가 힘들었다.

겨우 한 층을 걷어내자 그 속에 글씨를 새긴 글이 나왔다.

 

"南來妖師 朴相來 單知一節之死未知 萬代榮華之地"

남쪽에 요상한 지관 박상래가 나타나 단지 일절룡이 죽은 것만 알고 다른 것은 모르니 만대영화지지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즉 박상래는 이 곳을 흉지라고 얘기하고 이장할 것을 권유할 것이나 믿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후손들은 선조의 용의주도한 글귀에 감탄하여 이장하지 않고 그대로 다시 묻었다.

전의 이씨는 그 뒤로도 계속 번창하여 고려와 조선시대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고 전해내려오는 절설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