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홍성 조양문(朝陽門)
충남 홍성의 홍주성은 삼국시대 때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근거는 없다고 한다.
그후 조선 세종임금 때 성을 보수하기 시작해 문종 때 성을 완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는 읍성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성벽의 길이가 약 1,770m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약 800m의 성벽과 남문인 조양문과 관아문인 홍주아문이 남아 있다.
조양문은 홍주성의 남문으로 1975년에 복원했다.
원래 홍주성에는 동서남북 네 곳의 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문인 조양문만 복원되어 있다.
조양문에서 홍성군청으로 들어가면 군청 정문 옆에 홍주아문이 있다.
옛 홍주목의 관아가 있던 자리에 지금의 홍성군청 건물이 있는 것이다.
군청 건물 주변에는 당시 동헌 건물이었던 안회당과 작은 연못 속의 정자인 여하정이 아직도 남아 있다.
홍주성의 성벽 역시 이 군청 옆에 있다.
현재는 이렇듯 그 흔적이 많이 남지는 않았지만, 이 홍주성은 임진왜란 때 등 수많은 전투가 있었고, 또 구한말에는
천주교인들의 박해가 있었던 곳이라 한다.
홍성에 진입하여 길 한가운데에 당당하게 버텨 선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과 맞부딪치면 이 고장이 자기 역사를 꿋꿋하게 지켜 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적 제231호로 지정되어 있는 홍주성을 보기에 가장 좋은 곳은 홍주아문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간 곳이다.
돌을 잘 다듬어 얌전하게 쌓아올린 4m 높이의 석축이 둘러 있다.
현재 남은 길이는 810m 정도인데 이것도 일제 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서문과 북문을 철폐하고 성곽을 허무는 것을 읍민들이 강경하게 반대하여 이만큼이나마 남은 것이다.
원래 성곽길이는 1,772m 였다고 하니, 그 모습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면 해미읍성, 낙안읍성과 함께 손꼽히는 읍성유적이 되었을 터라 안타깝기 그지없다.
홍주성은 백제가 멸망했을 때에 부흥군의 중요 거점이었던 주류성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처음 성을 쌓은 것이 언제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조선 초기인 문종 1년(1451)에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고 각 읍성을 새로운 법식에 따라 고쳐 지을 때에 새로 수축한 모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의 축성규칙에 따른 모습을 충실히 보여 주어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그 가치가 높다.
축성 당시에는 적대(敵臺)가 24곳, 문이 4곳, 성내에 우물이 2곳 있었으며 둘레에는 해자를 파지 않았다고 한다.
여러 번 수리를 했으나 1870년에 목사 한응필이 동문인 조양문(朝陽門)과 서문인 경의문(景義門), 북문인 망화문
(望華門)과 관영(官營)을 지었다.
다른 성들과는 달리 남문은 문루가 없는 점이 특이하다.
북문에서는 역대 목사들이 사형수를처형하였으며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에는 잡혀온농민군 수백명이처형되기도했다. 또 홍주성이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천둥이 땅에 떨어지는 형세’ 이어서인지 조선 선조 때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싸움을 많이 치른 셈이다.
그래도 이 성의 역사는 주로 일본의 침략과 관련되어 있다.
고려 때부터 해서 16차례에 걸쳐 왜구의 침공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세영·이종식 들이 그 이듬해에 화포 6문과 병사 1,100명을 이끌고 와서 홍주성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덕산으로 밀어 낸 전적도 있다.
그러나 앞에 말했듯이 일부만 남고 일본인의 손으로 헐리고 말았다.
근래에 들어서는 1978년에 홍성 지역을 강타한 큰 지진을 만나 석축이 일부 허물어지기도 했으나 3년에 걸쳐 복원했다. 홍성읍의 남산을 둘러싸고있어 ‘남산공원’의 일부이기도한 홍주성은 홍성 사람들의 도심 공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성곽 초입에는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를 박두진의 글씨로 새겨 놓은 시비가 있고 1949년에 세운 김좌진 장군비도 있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 있다.
예산 방면에서 21번 국도를 따라 홍주 읍내로 들어가 홍주교를 건너(홍주교 건너 오른쪽에는 버스터미널이 있다)
약 200m 더 가면 나오는 사거리 중앙에 조양문이 있다.
홍주성은 조양문 뒤 한국통신 건물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200m 정도 들어가면 군청이 나오고(군청 입구에는 홍주아문이 있고 군청 안에는 안회당이 있다) 군청 앞 왼쪽으로 난 언덕길을 따라 조금 가면 성벽이 나온다.
군청 앞에는 주차할 곳이 있으며, 읍내에는 여관과 식당 등 숙식할 곳이 많이 있다.
조양문
홍주성의 문루 가운데에 가장 중심이 되는 문이며 유일하게 복원된 것으로 사적 제201호이다.
주문이 동문인 점은 대개 남문이 주문인 다른 성들에 견주어 특이하다.
그러나 홍주성이 서해로부터 침공해 들어오는 왜구를 물리치는 거점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고층건물이 그다지 많지 않은 홍성이기에 이 조양문은 수없이 돌아가는 자동차들 사이에서도 위축되지 않은 당당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 준다.
조양문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에 다포계 건물이다.
단정하게 홍예를 두르고 쌓은 석축도 정연하고 꽤 높아서 서울의 남대문이나 수원의 팔달문보다 규모는 작아도 그에
못지않게 당당하다.
그런가 하면 물받이에 돋아난 연꽃조각이 섬세하고 곱다.
1870년에 한응필이 대대적으로 중수할 때에 북문, 서문과 더불어 지었던 것이나 1906년의 의병운동 때에 치열했던 격전으로 말미암아 문루가 심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또 원래 옹성이 있었으나 일제 때에 훼철되었는지 지금은 없다.
현재 모습은 1975년에 완전히 해체하여 복원한 것인데 석축 가운데 부분에는 세월의 때를 입은 옛 돌이, 바깥쪽 에는
흰빛의 새 돌이 있어 세월의 대조를 보여 준다.
홍주아문
옛 홍주목 자리를 홍성군청이 그대로 물려받아 있어 홍주동헌 외삼문이었던 홍주아문(洪州衙門)이 지금도 구실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 역시 1870년에 홍주목사 한응필이 성곽을 중수할 때에 크게 고쳐 지은 것이다.
정면 3칸으로 가운데에 솟을대문이 우뚝 솟아 있어 권위를 한층 북돋운다.
그러나 긴 석재 주추에 세운 기둥은 매우 가는 편이다. 현판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쓴 것이라고 한다.
홍주아문 앞의 아름드리 느티나무도 100년을 넘겨 운치가 있는데, 군청 마당으로 들어서면 그늘을 한껏 드리운 큰
느티나무가 600년 가까이 이 오래 된 행정중심지를 지켜보고 있다.
군청 건물을 지나 뒤뜰로 가면 홍주아문과 함께 1870년에 지어진 동헌 안회당(安懷堂)이 있다.
정면 7칸이며 전체 22칸의 긴 건물로 오른쪽에는 누마루가 살짝 튀어나왔는데 전체적으로는 권위적이지 않으면서도
늠름한 자태를 풍기고 있다.
1977년에 개수 되어 비교적 말끔 한데 가운데에 대청을 두고 양쪽으로 방이 있어 홍성의 여러 유물유적 사진을 걸어
놓거나 『홍성읍지』 같은 책을 진열해 놓아 사료전시실로 쓰고 있다.
안회당의 뒤는 홍주목사의 후원이었던 듯 풍치 좋은 연못에 수련이 가득해 눈과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못 가운데 여하정(餘何亭)은 고종 33년(1896)에 목사 이승우가 연못가에 세운 육모 지붕 정자이다.
뜰이나 정자 모두 규모는 크지 않으나 여름날의 정취를 만끽하기에는 그만이다.
잔디밭 한쪽에 당시의 것인 듯한 석재들이 좀 남아 있다.
아침에 뜨는 태양을 맞이하는 첫 관문! 조양문(朝陽門)
홍주성의 동문이자 주문인 조양문은 홍주의병, 동학농민운동 등 격변의 역사를 그대로 담은 채 홍성시내 한 복판에 우뚝 서 있다. 일제강점기에 홍주성의 북문(망화문)과 서문(경의문)이 일본인에 의해서 훼철되었고, 조양문마저 파손하려 하였으나 읍민의 격렬한 반대로 지켜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홍성에서 조양문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현재의 조양문은 1870년에 홍주목사 한응필(韓應弼)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 중건되었고 그 내용은 조양문신건기(朝陽門新建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홍주목사 한응필은 조양문과 홍주성을 보수한 이유에 대해서 홍성(당시 홍주)가 대읍으로써 갖고 있는 지리적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읍(邑)을 성(城)이라 말하는 것은 지키고 방비하는 뜻을 중하게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읍(邑)이 있으면 반드시 성(城)이 있고 성이 있으면 반드시 관(關)이 있으니 만고에 사해(四海)를 지키고 방비함에 적의한 법규이다. 작은 읍(邑)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큰 읍(雄府)의 방비함의 큼이랴! 주(州)는 서남의 바닷가에 있으니, 충청수영(水營,오천)과 보거(輔車 위턱과 아래턱)와 같으며, 경기(京畿)의 목(項)이 되는 곳이다』
실제 홍주성은 이런 위치의 중요성 때문에 임진왜란, 이몽학의 난 중에도 백성들을 든든히 지켜낼 수 있었으니, 홍주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이) 충청도 53읍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했던 것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봉수산(鳳首山)의 관문에서 뜻을 취한 조양문은 지금이야 수많은 고층건물들을 보고 자란 현대인들에게는 그 웅장함이 잘 느껴지지 않겠지만, 당시 이 지역에서 가장 크고 웅대한 건물이었던 조양문은 그 시대 사람들의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는 조양문신건기(朝陽門新建記)에도 잘 드러나 있는데 관련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홍예를 두른 것이 크고, 단청의 장엄하고 화려하니 가히 큰 고을의 기상이도다, 대도(大都=한양)와 같은 성곽은 동서를 두르니 이 성을 지나는 자는 이를 경유하지 않고는 출입할 수 없으니 이를 우러러 보고 모두 말하기를, “크도다. 우리 임금의 만세를 위하여 대원군께서 한 번 하필(下筆)하니, 낚시의 철사 줄의 조화를 부려서 추락하는 관문을 일으키셨네. 장차 철관(鐵關)과 함께 오래 지속될 것이다.”고 하니, 홍주(洪州)에 크게 새로지은 관청은 지은 것이 거의 방비하는 비책에 도움이 되는 것이니, 이는 실로 우리나라를 견고하게 하는 큰 복이 된다고 말할 것이다.』

조양문에서 남쪽으로 가다보면 처음 보이는 성곽의 일부.
그렇게 성곽이 높지는 않습니다.
실제 처음 조성 목적은 행정적인 이유가 큰것으로 보입니다.
방어용으로 그리 위협적이라는 느낌은 안들거든요.
성의 둘레길이는 총 810m라고 합니다.
그렇게 큰 성은 아니죠. 그런데 나름 반전이.. 진짜 방어용으로 구축한 성이라네요.
그것도 1870년. 더이상 이런류의 성벽이 방어의 기능을 수행하기 힘든 시절에 말이죠.
당시 조선이 국방에 있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었나를 보여주는 사례인듯해서 좀 씁쓸하군요.

성 안쪽에 있는 비석들. 홍주 병오 의병 기념비입니다. 1906년 을사조약에 반대해서 민종식 등이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점령했었죠.
그 기념비입니다.


홍주성 성곽.

성곽을 따라 홍주의 유명한 인물들 흉상이 있습니다. 김좌진 장군.

한용운 스님

조선시대 사육신 성삼문.

홍성 터미널 가는길에 홍성 읍내 한가운데 있는 김좌진 장군의 동상

홍주성의 옛지도.
'건강한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언제 피고 질지 모른다 꽃이나, 그대 인생이나 (0) | 2014.04.04 |
|---|---|
| 한국의 산하 명산100 (0) | 2014.04.02 |
| 각종암에 사용되는 약초 (0) | 2014.03.29 |
| 우리나라 100景 (한국관광공사) (0) | 2014.03.28 |
| 한반도 산맥 (0) | 2014.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