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도 크기에 따라 치(재), 현, 령, 관 등으로 구분
대령(大嶺)-대관(大關)-진고개 모두 '큰고개'의 뜻
□ 고개 위가 하늘폭이 겨우 석 자라고
태백산맥 서부 산지에 있는 대관령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과 강릉시 성산면의 경계에 있다.
영서와 영동을 연결하는 영동고속도로 동쪽의 마지막 고개로, 해발고도 832m.
대관령 지역은 백두대간 해안산맥의 중부로서, 황병산(黃柄山), 노인봉(老人峰), 선자령(仙子嶺), 발왕산(發旺山)에 둘러싸인
분지로, 동쪽은 대관령이 경계이고, 서쪽은 유치(杻峙.싸리재)와 경계를 이루는 고위평탄면(高位平坦面) 지형이다.
비가 많은 편(연강수량은 1450㎜)이며, 지대가 높아 기후가 평지와는 많이 다르다.
몹시 추워 9월이면 벌써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얼며, 눈이 많이 내린다.
겨울이 긴 반면에 봄과 가을이 짧으며, 여름도 길지 않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대관령 일대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옥수수, 감자 등의 농산물을 재배하거나 송이버섯을 채취하며 생활을 꾸려 가는 한적한 산촌 지역이었다.
지금은 우리 나라 유일의 고랭지 시험장이 있어 여러 작물을 시험 재배하고, 소와 양의 사육 시험도 하고 있다.
전에는 이 지역 주민들이 통나무를 기와 크기의 널빤지로 쪼개어 지붕을 이은 너와집이나 이 지역에 흔한 점판암(粘板岩) 조각으로 지붕을 이은 돌너와집을 짓고 살았다. 요즘은 화전민들이 사라지면서 나무로 만든 너와집은 찾아보기가 어렵지만, 열이 잘 보존되는 돌너와집은 겨울이 길고 추운 이 지역에서 아직도 유용한 주거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돌너와집을 지을 때 쓰는 점판암은 진흙이 단단히 굳어서 이루어진 검은 바위로, 몸이 곱고 얇은 조각으로, 떡켜처럼 얄팍하게 갈라지기를 잘하는 성질이 있어, 기와처럼 이용하기에 매우 좋은 퇴적암이다.
□ 대관령은 군사적 요충지
대관령은 지대가 높기에 조선시대 정도전(鄭道傳)의 시에서는 '하늘이 낮아서 고개 위가 겨우 석 자'라고까지 과장해 표현했다.
그런 데다가 지세가 험하니 교통이 불편할 수밖에 없어 임진왜란(1592) 때를 빼고는 전쟁에 휩싸였던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군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고려 고종 4년(1217)에 최원세(崔元世)와 김취려(金就礪)가 거란군을 여진 땅으로 몰아내는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에도 대관령이 등장한다.
'---- 관군은 드디어 산마루로 올라가서 밤을 새웠다. 질명(質明.날이 샐 무렵)에 적이 과연 산마루 남쪽으로 진군하여 먼저 수만 명으로 하여금 좌우의 산봉우리로 나누어 올라가게 하여 요해처를 쟁취하려 하였다. 취려가 장군 신덕위(申德威), 이극인(李克仁)으로 하여금 왼편을 맡게 하고, 최준문(崔俊文), 주공예(周公裔)로 오른편을 맡게 하고, 취려는 가운데에서 북을 처서 격려하니 군사가 모두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중군이 이것을 바라보고 또한 크게 외치며 다투어 전진하니, 적이 크게 패하여 버리고 간 노약한 남녀와 병기, 치중(輜重)이 질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적은 끝내 남하하지 못하고 모두 동쪽으로 달아나므로 이를 추격하여 명주(溟洲) 지금의 강릉 대관령에 이르렀으나, 장수와 사졸들이 겁약해서 후퇴하여 주둔하였다가 10일 만에 진군하니 적은 이미 대관령을 넘어간 후였다. 중군, 좌군, 전군이 다시 추격하여 모로원(毛老院)에 이르러 이를 패배시켰다.
※ 모로원(毛老院)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마평리에서 대화면 노근리로 가는 넘는 몰잇재(모로현) 밑에 있었다.
'공중에 치솟은 대관령은 여러 늙은 아비 / 大嶺凌空衆父父
여러 주름살이 동으로 와서 팔다리처럼 흩어졌구나 / 衆皺東來散肢股
팔이 나뉘고 다리가 갈려 평호를 두른 곳에 / 肢分股別擁平湖
푸른 메와 흰 물결이 서로 삼켰다 토했다 하네 / 靑巒白浪相呑吐,---'
<속동문선> 제5권에 나오는, 조선 초기 학자인 성현(成俔)(1439∼1504)의 '경포대를 오르며(登鏡浦臺)'의 일부이다.
이처럼 대관령은 '공중에 치솟은'이란 표현처럼 옛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높음'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영동지방을 간다고 하면 으레 대관령을 들먹이는 일이 많았다.
□ 울고 넘던 고개라던 대관령
대관령 정상에는 대령원(大嶺院), 횡계리에는 횡계역이 있어 험준한 교통로에서 여객의 편리를 도모하고 있다.
지금은 고개 모습이 달라지고, 고갯길 위치도 조금 빗겨 가면서 도로폭도 많이 넓어진 대관령이지만, 옛날엔 산굽이도 더 많았고,
길폭도 지금과 같지 않았다.
대관령 옛길은 조선 중종 때 고형산이란 사람이 조금 넓혀 놓았다. 이 고개는 그야말로 '울고 넘는 고개'였다.
한양쪽에서 영동으로 가다가 관원들이 이 고개 산마루에 겨우 올라 멀리 푸른 바다가 보이면 그제서야 세상 끝에 당도했다고 눈물을 흘렸고, 떠나올 때는 그 동안 정들었던 생각을 하며 울면서 갔다 하여 '울고 넘는 고개'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고개 마루 반정에서는 강릉시내가 내려다보인다. 이율곡(李栗谷)이 어머니 신사임당의 손을 잡고 한양으로 가기 위하여 험한 산길을 오르던 모습과 지금 가면 친정에 또 언제 오려는지, 오죽헌을 향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신사임당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곳.
늙으신 어머님을 강릉에 두고
이 몸은 서울길로 홀로 가는데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하고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내리네
-신 사임당
그 옛날 대관령을 넘었을 때는 정말 아찔함의 연속이었다. 이 고개를 넘어본 사람들은 아래로 향해 곤두박질치는 듯한 느낌과 구불거리는 길 위에서 사람들이 좌불안석이었다고 지금도 말한다.
새 길이 생기면 옛길은 없어지게 되지만, 아직도 대관령에는 옛길이 잘 보존되어 있다.
윗반정에서 강릉시 어흘리 대관령박물관에 이르는 약 5㎞의 호젓한 오솔길로 이어져 있는 대관령 옛길은 조상들이 괴나리 봇짐에 짚신 차림으로 넘었던 고갯길. 굽이가 많아서 고개가 높아도 비탈이 그리 가파르지 않아 2~3시간이면 그리 힘들이지 않고 넘는다.
대관령에는 옛날에 골짜기 한켠과 반정에 주막이 각각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강릉 사람들이 많이 기억하는 것은 반정 주막.
아흔아홉굽이 대관령을 넘는 중에 반정 주막터에 잠시 머무르면 강릉 시내와 동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반정 주막은 옛사람들이 고개를 오르다가 땀을 씻으며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던 곳. 역마 제도가 있었던 조선시대엔 영동선의 구산역과 고개 너머 황계역의 중간이라 하여 '반쟁이'라고 불렀다는 곳이 바로 그 주막터이다.
고개 중턱 어흘리 길가에 있는 대관령박물관에는 연자방아, 돌대야, 구리거울, 토우 등 질박한 삶의 흔적들을 모아 두고 있다.
대관령 옛길은 이제는 어쩌다 옛 추억과 향수에 이끌리는 몇몇 여행객들, 산을 즐기는 등산객들이 오르내리거나 마을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만 오가는 한적한 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전에는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던 중요한 교통로답게 어른 두세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옛길로서는 제법 그 폭이 제법 널찍하다.
그런데, 지금은 '대관령을 넘는다'는 말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 서울에서 간다고 해도 대관령 고갯길이 아닌 터널을 통해 바로 강릉쪽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동고속도로의 횡계-강릉 구간은 지난 2001년에 개통된 신작로. 총 21.9km로, 서울에서 강릉까지를 무려 1시간 여나 단축시켰다.
□ 대관령이란 이름은 대령(大嶺)의 첩어식 이름
강원도 강릉시와 평창군 사이의 고개인 대관령은 그 길이가 13㎞나 된다.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고, 문화의 전달로이며, 큰 생활권의 경계지라고 할 수 있다.
강릉시 관련 모 홈페이지에서는 '대관령'이란 이름에 관해서 이렇게 적어 놓았다.
'대관령이라는 지명을 이 지역 사람은 '대굴령'이라고도 부른다. 고개가 너무 험해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구르는 고개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 '대굴령'을 한자로 적어 '대관령'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대관령이란 이름이 '대굴대굴'이라는 의태어에서 나왔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것은 '대관령'이라고 할 때 '대갈령'이라고 발음하기 쉬운데, 이 지역 사람들의 특이한 사투리 관습에 따라 그것이 '대굴령'으로 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굴'이라는 순 우리말과 령(嶺)'이라는 한자말의 조합도 이해하기 힘들다. 대굴대굴 구르는 고개라는 뜻이 자연스럽게 지명처럼 정착되려면 이것이 '대굴고개'나 '대굴재'로 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며, '대굴+령' 형식의 이름으로 가기는 쉽지 않다.
대관령은 '대령(大嶺)'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동쪽 경사면의 도로는 '아흔아홉구비'라고 한다.
'대관령'을 '대령(大嶺)'이라고도 불렀다는 사실은 이 고개 정상의 대령원(大嶺院)이란 이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여지승람>에도 대관령이 대령(大嶺)이라고 칭하였다고 나온다.
'아흔아홉고개'란 말은 이 곳뿐 아니라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서리 등 전국에 여러 곳에 있는데, 이러한 이름은 고유명사적 이름이 아니라 일반명사적 이름이라 할 수가 있다. 즉, 산굽이가 무척 많은 고개'라는 뜻의 일반적 이름인 것이다.
'대관령'이란 이름은 어디까지나 한자 이름의 대관령(大關嶺)이며, 순 우리말 지명이 직역된 이름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대관령'이란 이름에서 '대관(大關)'이라고만 해도 이것이 고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대령(大嶺)'이라고만 해도 역시 고개 이름이 될 수 있다. '관(關)'은 지명에서 '고개'의 뜻으로 붙여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따라서, 고개 이름은 결국 '대령(大嶺)'이며, 대관령이란 이름은 '역전앞'과 같은 첩어식 지명이라 할 수 있다. 경북 문경 새재의 '조령(鳥嶺)'을 '조령관(鳥嶺關)'이라고도 하는 것을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마도 그 옛날에는 그저 이 고개를 '큰 고개' 또는 '긴 고개' 식으로, 일반적 이름처럼 불렀으리라고 짐작된다.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그리고 주로 학자들에 의해 문헌 등에 자주 적혀 올려지다 보니 '대령' 또는 '대관령'으로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 서울에서 강릉쪽으로 곧장 가다 보면 이 고개처럼 아주 큰 고개는 없다.
이렇게 보면 대관령 근처에 있는 진고개 역시 한자로 의역해 표기하면 대령(大嶺)이 될 것이다. '진고개'는 '긴 고개'이며 이 역시 '큰 고개'의 의미와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고개는 대관령처럼 그리 왕래가 많지 않았고, 학자들이 글로 적어 올릴 일이 대관령처럼 많지 않아 이를 의역해 적을 필요가 별로 없어 순 토박이 이름인 '진고개'가 그대로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 진고개도 사실상 '큰 고개'의 뜻
고개를 크기에 따라 말할 때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가 있다.
첫째는 얼마나 높으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얼마나 고갯길이 길게 뻗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고개가 높으면 자연히 고갯길도 길어질 수 있으므로 고개가 크다고 할 때는 이 두 가지가 다 포함될 수가 있다.
우리말에서 높은 고개라고 할 때 이를 한자로 '고현(高峴)'이라고도 할 만하건만 어느 국어 사전에 찾아봐도 이런 낱말은 별로 볼 수가 없다. 다만, 이 이름은 고유명사로서만 사료에 들어가 있을 뿐이다. 사료에 보면 삼국시대에 신라 장수 거칠부(居柒夫)가 고현 이남의 10군을 빼앗았다는 북의 땅을 빼앗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의 고현은 바로 철령(鐵嶺)을 말하는 것이다.
또 긴 고개라고 할 때도 '장현(長峴)'이란 말이 당연히 나올 만하지만, 이 역시 국어 사전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전국에는 '장현(長峴)'이란 이름의 고개가 무척 많은데, 이런 고개들의 토박이 이름들을 보면 대개는 '긴 고개'의 변한 말인 '진고개'가 대부분이다. 혹자는 진고개를 고갯길이 질어서 그렇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뜻을 갖춘 고개라기보다는 대개는 '긴 고개'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발음 습관상 구개음화(口蓋音化)가 심한 남부 지방에서는 '기름'을 '지름'으로, '드새다'를 '지새다'로, '겨울'을 '저울'이라고 많이 하는데, 이러한 발음 습관에 따라 '긴 고개' 역시 '진 고개'가 되는 것은 도리어 더 당연하게도 보인다.
□ 고개에도 크기에 따른 급수가 있다
대동여지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산(山)'을 높낮이와는 관계없이 독립된 산의 개념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악(岳)은 무주의 삼도봉(三道峰)이나 서울의 도봉(道峰)처럼 덜 험한 지형의 것으로 풀이한다.
산이름에서 암(岩)이 뒷음절로 들어가면 우이암(牛耳岩), 관음암(觀音岩)처럼 산 정상이 바위로 이루어진 산으로 본다.
고개에 해당하는 령(嶺)은 옛날에 국경을 방비하던 관방(關防)이 있던 곳으로, 대관령, 한계령, 조령, 추풍령 등이 이에 속하고,
현(峴), 치(峙)의 경우는 구분이 령에 비하여 작은 고개로 본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치는 현에 비해 다소 험한 고개로 본다.
그 예로 남원, 운봉의 팔랑치나 횡성의 삼마치가 용인의 수유현, 춘천의 부황현에 비하여 다소 높고 험한 지형의 고개라는 것을 들고 있다.
산이름에서 끝음절이 대(臺)로 되어 있으면 산지의 고원이나 대지에 해당하는 지명으로, 야산 또는 고원의 의미를 지니게도 된다.
대동여지도에서는 산(山), 악(岳), 암(岩), 봉(峰), 구(丘), 대(臺), 덕(德), 곡(谷), 계(溪), 현(峴), 영(嶺), 치(峙), 고개(古介), 굴(屈) 등의 산 관련 지명을 볼 수 있다.
산지에서 고원(高原)이나 대지(臺地)에 해당되는 지명이 대(臺)와 덕(德).
대는 경포대(鏡浦臺), 강경대(江景臺)와 같이 정자를 지을 수 있을 정도의 야산을 뜻하고, 덕은 검의덕(檢義德), 가목덕(加木德) 등과 같이 오늘날의 고원을 뜻한다.
신경준의 <산경표>에서는 대간(大幹), 정간(正幹), 정맥(正脈)에서 산이름, 고개 이름 등을 나열해 그 맥의 흐름을 짚어 주고 있다. 이 중에서 백두대간의 것에서만 고개 관련 이름의 것만 추려 보면 령(嶺)이 48개, 현(峴)이 5개, 치(峙)가 8개로 나온다.
다른 정간이나 정맥 부분에서보다 '령'의 빈도가 훨씬 높다.
이것은 백두대간에서는 다른 맥에 비하여 령(嶺)급의 고개가 무척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4년 4월 27일, 조선일보 [알고 싶어요]난을 통해 '고개 이름을 쓸 때 치, 영, 재 등 다양한 이름을 쓰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이 들어왔다.
신문사의 요청으로 필자인 내가 지면을 통해 다음과 같은 답을 주었다.
'고개'를 뜻하는 표현에 영(嶺), 현(峴), 치(峙) 등이 있다.
'매우 큰 고개'란 뜻으로 관(關)이 쓰이기도 한다.
고개는 '산이나 언덕의, 넘어 오르내리게 된 비탈진 곳'을 말한다.
지명의 뒷음절로 들어갈 때는 '벌고개' '싸리고개'처럼 앞 음절이 일반명사인 경우가 많다.
'재' 역시 독립적으로 쓰이는 낱말이며, 고개와 거의 같은 뜻이다.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등에서 보듯 옛날에는 사용 빈도가 높았다.
그러나 지금은 고개라는 말에 묻혀 사용하는 경우는 적다.
고개 이름에 다른 낱말이나 지명이 붙는다. '재'는 단순히 고개의 뜻을 넘어, 산(山)이란 의미로도 사용된 듯하다.
치(峙)는 고개란 뜻이지만 독립적으로 쓰이진 않는다.
서울 대치동의 대치(大峙)나, 남원의 웅치(熊峙), 원주의 송치(松峙)처럼 두 음절 지명에 치가 많이 들어간다.
영(嶺)은 명사 뒤에 붙어 고개임을 뜻하는 접미사로 쓰이지만, 독립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백두대간을 넘는 고개인 조령(鳥嶺), 추풍령(秋風嶺), 한계령(寒溪嶺)처럼 비교적 큰 고개에 영(嶺)이 많다.
고개를 뜻하는 것에 현(峴)도 있는데, 애오개라 했던 서울의 아현(阿峴), 인성붓재라 불렸던 인현(仁峴) 등이 좋은 예이다.
관(關)은 한자 풀이로는 고개가 아니지만, 두 지역을 지형적으로 크게 구분짓는 큰 산줄기의 목(고개)을 나타내는 데 쓰이기도 한다.
□ 고개의 뜻인 관, 영이 관북, 영남 등의 이름을 낳고
사전에서는 '관(關)'을 '국경이나 국내 요지의 통로에 두어서 외적을 경비하며 그 곳을 드나드는 사람이나 화물 등을 조사하던 곳'
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명사적인 풀이이고, 땅이름에서는 '중요한 고개'의 뜻으로 쓰인 경우가 많다.
우리 나라에서는 '관'을 고개 이름으로 쓰인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지방의 명칭을 정하는 데는 '관'을 고개로 생각하여 정한 경우가 있다.
함경도 지방을 가리키는 '관북지방(關北地方)'이라는 말과 평안도 지방을 가리키는 '관서지방(關西地方)'이 그 좋은 예다.
'관북'이라는 말과 '관서'라는 말에서의 '관'은 사전에서의 풀이와는 거리가 멀다.
관북-관서에서의 '관'을 학자들은 강원도 안변 지방에 있는, 즉 백두대간 해안산맥 북단에 있는 '철령(鐵嶺)'으로 보고 있다,
즉, 이 고개 북쪽 지방이 관북이고, 서쪽 지방이 관서이다.
전에는 함경도의 마천령 남쪽 지방, 곧 '함경남도'를 '남관(南關)'이라 했고, 함경도 전체 지방을 일컬을 때는 '북관(北關)'이라고도 했다. 관동지방(關東地方)은 지금의 동해안 지방을 가리켰는데, 여기서의 관은 철령을 지목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백두대간의 동쪽이란 뜻을 담은 것이다.
그러나, 관동을 대관령의 동쪽이란 뜻으로 풀이해도 무리는 없다.
강원도의 백두대간 서쪽 지역, 즉 영서지방을 뺀 지역이 강원을 총칭해서 관동이라 했는데, 이는 옛날 강원도에 있는 아홉 군(郡)이 모두 동해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 백두대간 서쪽의 춘천을 비롯한 고을들이 성장하자, 태백산맥을 경계로 강원도를 두 지역으로 구분하여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라 하게 되었고, 관동만이 강원을 총칭하는 지방명으로 남게 되었다.
고려 성종 때 전국을 10도로 나누면서 오늘의 서울과 경기도 지역을 관내도(關內道)라고 하였는데, 강원도 지역은 관내도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관동이라 했다고도 한다.
관동과 관북, 즉 강원도와 함경도를 일컬을 때는 '관동북(關東北)'이라 하기도 했다.
평안도 지방은 관용상으로는 관서라는 말보다 서북로(西北路), 서북계(西北界), 서로(西路) 또는 서북도(西北道)라는 이칭이 더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지형적 명칭이라기보다는 행정적 또는 교통적 명칭으로 볼 수 있다. 이 이칭은, 995년(고려 성종 14)에 전국을 10도로 나누었을 때, 이 지역을 패서도(浿西道),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이라 하고, 후에 북계(北界), 서북면(西北面)이라 개칭하였다가 1102년(숙종 7)에 서북계(西北界)라고 한 데서 연유한다.
백두대간의 태백산 남쪽 줄기, 즉 전에 소백산맥이라 했던 곳의 이남 지역은 '영남(嶺南)'이라 했는데, 이것은 태백산맥의 서쪽을 영서(嶺西)라 한 것과 같은 개념이다. 그러나, 영남이라 말을 쓴 것에 비하여 '영북(嶺北)'이란 말을 쓴 예는 거의 없다. 이것은 이미 새재 이북의 광역 지명이 기호(畿湖), 호북(湖北), 영서(嶺西), 중부(中部) 등의 이름으로 거의 고정화되어 있어 '영북'이란 이름의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남이란 이름이 백두대간 중에서도 새재(조령), 대재(죽령), 가파름재(추풍령) 남쪽의 지역이란 뜻으로 붙여졌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관북, 관서, 영동, 영서, 영남 등이 산줄기를 중심으로 하여 붙여진 데 반하여 호남(湖南)이란 이름은 강줄기를 중심으로 하여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강은 당연히 금강(錦江)일 것이며, 여기서의 '호(湖)'는 호수가 아니라 강(江)을 의미할 것이다. '호'가 강을 의미함은 서울 근처에서 금호(金湖), 용호(龍湖), 동호(東湖), 서호(西湖) 등이 모두 호수가 아닌 한강의 부분 이름이었음을 상기하면 될 것이다.
일부에서는 호남의 호가 제천의 의림지(義林池)라는 의견을 내기도 하나, 이는 한자의 '호(湖)'를 단순히 큰 못(湖)으로 생각한 데 따른 것이다. /// 글. 배우리
'생활에지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아몬드 품질 평가 기준 '4C' (0) | 2015.05.20 |
---|---|
살림9단의 지혜 (0) | 2015.05.19 |
죄송罪悚과 송구悚懼 (0) | 2015.05.02 |
도참정치의 허와 실 (0) | 2015.05.01 |
띠별 특징과 풀이(十二之神) (0) | 2015.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