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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나 지금이나

호사도요 2015. 11. 23. 16:30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선 제1호 문과급제자 송개신과 이숙번의 '다른 길'

 

 

조선시대에 관리가 되려면 3년마다 한 번씩 간지(干支)에 자(子) 묘(卯) 오(午) 유(酉)가 들어가는 식년(式年) 전해 가을에

실시되는 초시(初試)를 통과해야 했다.

문과 초시의 경우 성균관 유생(50명)과 한양(60명) 및 지방(140명)으로 미리 인원을 배분해 250명을 선발했다.

이렇게 선발된 250명은 이듬해, 즉 식년 봄에 한양으로 올라와 3단계로 된 엄격한 시험인 복시(覆試)를 친다.

복시를 통해 33명이 선발되지만 우열(優劣)은 임금 앞에서 치르는 전시(殿試)에서 정해졌다.

이 33명은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으로 분등했다.

문과에 급제하더라도 전시에서 어떤 성적을 얻느냐가 결정적이었다.

갑과 1등, 즉 장원급제자는 종6품 실직(實職)을 받았고

2, 3등은 정7품, 을과 7명은 모두 정8품, 병과 23명 전원은 종9품을 받았다.

 

 

조선 최초의 식년시는 1393년(태조 2년) 계유년 봄에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33명 중 최고를 뽑으면서 무엇을 염두에 두었을까?

개국 초였기 때문에 장차 조선의 종묘사직을 튼튼히 해줄 미래의 정승감을 뽑으려 했을 게 분명하다.

이렇게 해서 계유년 6월 13일 송개신(宋介臣)이 장원급제자로 뽑혔다.

그런데 송개신은 관직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왜 죽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태종 3년(1403년) 11월 27일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송개신의 동생 송개석(宋介石)은 오늘날의 장군에 해당하는 대호군(大護軍) 송거신(宋居信)에게 자신이 좋아하던 기생 양대

(陽臺)를 빼앗기자 당대의 실력자인 조영무의 집에 '송거신이 영무를 죽이려 한다'고 익명의 투서를 했다가 발각됐다.

태종은 송개석에게 곤장 100대를 쳐서 합포(지금의 마산)로 귀양 보냈다.

대신과 관련된 거짓 투서는 당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였다.

그러나 송개석의 늙은 어머니가 태종에게 "큰아들 개신은 죽고 개석만 남아 있사오니 부디 목숨만 살려 제사를 잇게 해주소서

"라고 간청해 유배형으로 감형될 수 있었다.

 

 

아마도 조선 첫 번째 장원급제자인 송개신이 고속승진을 해서 태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면 굳이 송개석도 거짓 투서까지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게다가 송개신·송개석의 아버지 송문중(宋文中)도 고려 말부터 태조 이성계의 건국 사업을 도와 좌부승지까지 지냈기 때문에

왕실과의 연줄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송문중과 송개신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송씨 집안은 한순간에 몰락했고 자칫하면 대가 끊어지는 흉사(凶事)

까지 당할 뻔했다. 관운(官運)보다 중요한 것이 건강임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반면 송개신이 장원을 했을 때 을과 7등으로 간신히 턱걸이한 이숙번(李叔蕃·1373~1440)의 관력(官歷)은 송개신과 대조적이다.

문과급제 1년 후(1394년)에 좌습유(정6품으로 훗날 사간원 정언)에 오른 이숙번은 다시 4년 후인 1398년(태조 7년) 8월 26세의

나이로 5품직인 안성부 지사(안성군수)로 있을 때 하륜과 함께 이방원의 쿠데타를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졌다. 공을 세움으로써 벼락출세길이 열린 것이다.

 

 

특히 태종 즉위와 더불어 군부의 요직을 두루 맡았고 40세 때인 1412년(태종 12년)에는 3정승 바로 아래인 종1품 숭정대부로 승진해 1413년 병조판서를 지내는 등 정승(정1품)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태종 15년 공신 보호라는 미명으로 요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이듬해에는 불충 무례하다는 이유로 공신 자격을 박탈

당했으며 태종 17년에는 경상도 함양으로 유배를 감으로써 중앙정계에서 사라지게 된다.

제아무리 공신이라도 지존(至尊)의 심기를 건드리고서는 예나 지금이나 살아남기 힘들다는 교훈을 남긴 인물이 바로 이숙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