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즉시공 공즉시색
[ 色卽是空空卽是色 ]
정의
『반야심경』에서 물질과 공 또는 공과 물질의 관계를 표현한 불교교리.
내용
물질적인 세계와 평등 무차별한 공(空)의 세계가 다르지 않음을 뜻함.
원문은 “색불이공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며,
이는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로 번역된다.
그리고 범어(梵語) 원문은 “이 세상에 있어 물질적 현상에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바로 물질적 현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 현상을 떠나 있지는 않다.
또,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떠나서 물질적 현상인 것이 아니다.
이리하여 물질적 현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대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인 것이다.”로 되어 있다.
이 긴 문장을 한역(漢譯)할 때 열여섯 글자로 간략히 요약한 것이다.
따라서, 색은 물질적 현상이며, 공은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원래 불교에서는,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사고방식을 지양하고 이와 같이 평등한 불이(不二)의 사상을 토대로
하여 교리를 전개시켰다.
따라서, 중생과 부처, 번뇌와 깨달음, 색과 공을 차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대립과 차별을 넘어선
일의(一義)로 관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 명구 또한 가유(假有)의 존재인 색 속에서 실상을 발견하는 원리를 밝힌 것이다.
그리고 색과 공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여 색이 변괴(變壞)되어서 공을 이루는 현상적인 고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색의 당체(當體)를 직관하여 곧 공임을 볼 때, 완전한 해탈을 얻은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전통적인
해석방법이다.
이 구절에 대한 고승들의 해석은 많지만, 가장 명쾌하고 독창적으로 해설한 이는 신라의 원측(圓測)이다.
원측은 그의 『반야바라밀다심경찬(般若波羅蜜多心經贊)』에서 유식삼성(唯識三性)의 교리에 입각하여 이 구절을
해석하였다.
원측은 색즉시공에 대하여, “변계소집(遍計所執)은 본래 없는 것이므로 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은 마치 허깨비와 같은 것이어서 인연 따라 일어나는 까닭에 공이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생겨나지 않는 것이므로 마치 공화(空華)와 같고 그 자체가 또한 공한 것이다.”하였다.
다시 말하면, 변계소집에 의하여 일어난 색은 본래 없는 것을 망념으로 그려낸 것이기 때문에 공하다는 것이고,
의타기성에 의하여 생겨난 색은 인연 따라 존재하고 멸하는 가유(假有)의 색이기 때문에 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원성실성의 입장에서 보면 색이란 일어남도 일어나지 않음도 없는 공의 본질이기 때문에 역시 공하다는 뜻이다.
원측은 계속하여 색과 공이 하나인가 다른 것인가를 밝히면서, 만약 하나라고 하면 일집(一執)에 빠지게 되고 다르다고
하면 이집(異執)에 빠지게 되며, 하나이면서 다른 것이라고 하면 서로 위배되는 것이 되고, 하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라고 하면 희론(戲論)이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명구의 가르침은 색이나 공에 대한 분별과 집착을 떠나 곧바로 그 실체를 꿰뚫어보라는 데 있는 것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모든 질량은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산화하여 없어졌다 하여도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이 우주 공간에 에너지로 변화하여진 것뿐'이라고 하였다.
특수상대성이론은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갈릴레이나 뉴턴의 역학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고, 종래의 시간 · 공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혁시켰으며, 특히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等價性)을 발견하였다.
질량(=물질=色)과 에너지(=空)보존 법칙(e=n2)을 발표하고 증명하였다.
가령 우리가 종이에 불을 붙여 태우면 불꽃을 일으키며 몇 초 안에 모두 타버려서 우리 시각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허공계에 에너지로 변화하여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편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말은 불경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말이다.
색(色)이란 형태가 있는 것, 대상을 형성하는 물질적인 것, 넓게는 대상 전반을 가리킨다.
첫째,
구(句)는 색이란 모두 공(空)에 불과하다 하였고, 대상을 우리들은 어느 특정한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실은 그것은
광범한 연계 위에서 그때그때 대상으로서 나타나는 것일 뿐이며 그 테두리를 벗어나면 이미 그것은 대상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이므로 그 대상에 언제까지나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둘째,
구는 그와 같이 원래부터 집착할 수 없는 것을 우리들은 헛되이 대상으로 삼지만, 그것은 공이며 그 공은 고정성이 없는
것인데, 바로 여기에 인간의 현실(존재)이 있다고 설한다.
이것은 일체의 것. 즉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반야심경에서 앞부분에서 나오는 경구로서 색(色)
이란 모든 질량을 가지고 있는 물질을 포괄적으로 말함이니 정신이 있는 인간으로부터 단지 물질만 있는 나무, 돌, 쇠,
지구, 달 등 우주안의 모든 물질로 이루어진 것을 말함이요 공(空)이란 일체 물질이 없는 비어 있는 공을 말함이다.
그런데 그러한 물질이 알고 보면 공이요,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공이 곧 물질이라는 말로서 물질과 비어 있는 공의
세계가 둘이 아니고 하나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색과 공이 따로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불교와 상관없이 물리학자로서 질량(물질=色)과 에너지(=空)의 보존 법칙을 발표해 놓고 보니 후일 불교의 경전을 보고서 결국 자신의 물리학적 이론이 부처님이 설파하여 놓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임을 알게 되었고, 이후 불교경전을 많이 접한 후 그의 자서전에도 "21세기를 바라보는 인류에게 미래의 종교는 현대 물리과학에
부응하는 종교이여야 하는데 나를 보고 종교를 택하라고 한다면 불교밖에 없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물질로서 느껴지는 기본 단위를 양자라고 부른다.
빛의 경우는 관찰자가 입자로 느끼는 장치로 관측(관찰)하면 입자로 나오고 파동으로 느끼는 장치로 관측하면 파동으로
나온다. 즉, 느끼는 상태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이다. 이것을 색(물질)즉시공(파동)이라 하는 것이다.
일반적 물질은 여러 기본 입자가 뭉쳐 있으므로 입자의 성질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것을 강한 에너지(입자)로 적정한 힘 이상으로 충돌시키면 붕괴되면서 입자의 성질이 파동의 성질로 강하게 나타난다고 하였다.
반야심경 中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色不異空 - 空不異色 - 色卽是空 - 空卽是色 - 受想行識 - 亦復如是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다.
느낌, 생각과 행위 또한 그러하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한자어고,한글 뜻으로 풀이하면 이렇다.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이다.
여기서 색이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을 상징한다.
눈에 보이는 물체인 것이다.
더 나아가 생각, 감정, 오감까지도 포함될 수 있다. 색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있음'이다.
또한 공은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상징한다.
흔히 공이라고 하면 텅빈 공간을 생각하는데 틀렸다.
텅빈 공간은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은 인식할 수 없기에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공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없음'이다.
그렇다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다시 표현해볼 수 있다.
있음은 곧 없음이며, 없음은 곧 있음이다.
= 있음 그 자체인 이 세상은 사실 '실체 없음'과 같다.
= 있음 그 자체인 내 생각, 감정, 오감은 사실 '실체 없음'과 같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실제 예시를 보면 된다.
우리는 세상의 물체를 딱딱하게 고정되어 있는 실체라고 여긴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 내부의 99.99%는 텅 비어있다(空).
완전한 공, 완전한 '없음'이다.
우리의 생각, 감정, 오감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 감정, 오감이 분명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 다른 사람에게는 내 생각, 감정, 오감이 없다(空).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내가 아니기에, 내 생각, 감정, 오감을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의 95%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로 이루어져있다.
이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는 말 그대로 검은색 무언가이다.
하지만 전혀 실체가 없는 것(空)이고 질량과 에너지가 있다고 추측할 뿐이다.
또한 현실 세계와 참나 또한 그렇다.
현실 세계는 색, 즉 실재하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모든 것이 실재할 수 있는 이유는 텅 빈 앎, 그저 존재한다는 앎(참나)이 있어서 이다.
현실세계는 색이며, 참나는 공이다.
이렇듯 우리가 '진짜'라고 여기는 세상 모든 것들이 사실 '실체 없음'과 동시에 존재하며, '실체없음'의 특성을 가진다.
있음과 없음의 조화. 있음 속의 없음, 없음 속의 있음.... 음양의 조화, 또 태극이다.
어? 있음이 곧 없음이다... 어디서 들어본 말 아닌가?
그렇다. 도덕경 2장의 유무상생(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존재하게 한다.)이 떠오른다.
있음이 없음을 존재하게 만든다고? 뭔소리야?
이또한 실제 예시를 보면 쉽게 이해된다.
검은색 글씨는 배경인 종이가 없다면 쓸 수 없다.
글씨가 종이를 쓰임당하게 만드는 것이고, 동시에 종이가 글씨를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음악 속의 음계도 마찬가지다.
음은 음 사이의 공간(차이)들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도와 레 사이의 음, 도와 도#사이의 음) 만약 음과 음 사이의 빈음, 공백(空)이 없다면, 음은 세상에 단한가지 밖에
없을 것이다.
없음이 있음을 만들고, 있음이 없음을 만든다.
또한 그 둘은 같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사색과 통찰을 써봤다.
이는 내가 외부 자료에 의해 찾은 내용이 아닌, 스스로 생각해본 것이다.
공(空)은 어쩌면 에너지를 의미하고, 가능성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도 완벽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우주는 실현가능한 모든 가능성이 이미 존재한다고 한다.
이를 일원성의 궁극실재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가능성이 이미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이 무한개의 정보 형태로 동시에 존재하니 말이다.
변화가 없다면 시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와 너도 없을 것이며, 모든 것이 '나'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변화가 있고 시간도 있고 나와 너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진정한 공(空)의 본질은 아직 물질화되지 않은, 아직 인식되지 않은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 같다.
色卽是空=(色=빛 색/ 卽=곧 즉/ 是=보일 시/ 空=빌 공)
空卽是色=(空=빌 공/ 卽=곧 즉/ 是=보일 시/ 色=빛 색)
풀이
마음이 미혹될 때는 공을 색으로 하고, 깨달을 때는 색을 공으로 함.
본래 색, 공은 同一體(동일체)로서 차별이 없음을 이름. 색은 공으로부터 생기고 공은 색에 의해서 나타남.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체(色)는 공(空)이라는 말. 곧, 형상은 일시적인 모습일 뿐, 實體(실체)는 없다는 것.
'생활에지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강버스 25년 3월 정식운항 (1) | 2024.08.07 |
---|---|
조상님의 피서지 (0) | 2024.07.22 |
인 생 (0) | 2024.07.02 |
노이요지(怒而撓之) (0) | 2024.06.27 |
'러브버그' 대처법 (0) | 2024.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