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생활

흑산도· 영산도

호사도요 2014. 9. 6. 10:45

그 섬에 가고 싶다. 다도해 기행 <11> 흑산도·영산도


	흑산도

전남 목포항에서 쾌속선을 타고 비금도·도초도 사이를 지나니 외해(外海)였다.

바다는 거칠 것 없이 트였다.

이윽고 검푸른 바다 위 흑산(黑山)에 닿았다.

세월호의 여파인지 한산했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오징어배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3년 전부터라고 했다.

수온에 따라 남하한 오징어떼를 찾아온 동해 어선들이었다.

조기, 고래, 고등어 파시(波市)로 이름났던 곳에 새롭게 등장한 것.

흑산도는 여전히 홍어의 본산. 아침마다 수협 앞 공판장에서는 홍어를 경매한다.

아주머니는 "요즘은 좀 안 잡히는 모양인지, 한 마리가 67만원에 경매되었다"고 했다.

홍어만이 전부는 아니다.

양식·자연산 전복도 이름을 얻고 있었다.

요즘도 태풍만 불면 중국 어선이 피항한다.

그만큼 중국과 가까운 섬. 고대 9세기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중국과 일본, 동남아를 무대로 교역했던 당시,

흑산도는 중간 기착지였다.

한·중·일의 사신·상인 등을 실은 배들이 이 섬을 징검다리 삼아 오갔다.

흑산도는 흑산군도(群島)의 중심지. 영산도, 홍도, 다물도<사진>,

상태도, 하태도, 가거도, 만재도 등 유인도 11개와 무인도 89개를 거느리고 있다.

흑산도 예리항에서 유람선을 탔다.

소금강이라는 다물도를 한 바퀴 돌았다.

겹쳐진 지층들과 파도 위 우뚝 솟은 바위들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갈매기와 산염소들이 이들과 벗하고 있었다.

선장은 인생을 달관한 듯 소금강의 기묘한 형상들을 이야기로 풀어냈다.


	흑산도 개념도

다음엔 영산도.

흑산도 예리항 뒤편에서 바로 보였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잦자 섬사람들을 뭍으로 강제 이주토록 했다.

오늘날 영산포는 이곳 영산도(흑산도까지 포함한) 사람들이 와서 정착했다.

이 '디아스포라'에 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 그 사람들이 전한 것이 홍어.

그 영산도가 지금은 아담한 섬마을('명품마을')로 가꿔져 있었다.

전남 여수에서 섬마을 가꾸기를 배우러 온 일행들과 동행했다.

집들 사이로 난 마을 길과 높은 돌담장, 아늑한 포구를 가진 이 섬은 캠핑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우똑 솟은 바위산과 푸른 솔들이 우거진 등산로가 도시인들을 부르고 있었다.

다시 흑산도. 산길을 굽이굽이 올라가니 거센 풍랑 속에서도 풍어와 안녕을 빌어온 당(堂)이 남아 있었다.

통일신라 절터도 있었다.

천연습지를 간직하는 장도를 보면서 사리에 도착했다.

신유사옥(1801년)으로 유배를 시작한 정약전이 이곳에서 지냈다.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반영한 '자산어보'는 여기서 만들어졌다.

그 어보를 만드는 데 정보를 제공했던 장창대라는 사람은 흑산도 앞 대둔도 사람. 김기백 관광해설사는 어머니가 장창대의

직계 손이라고 했다.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하루 4번 출항. 쾌속선으로 두 시간. 문의 신안군 문화관광과 (061) 240-8356

 

 

실사구시[實事求是]
뜻: 사실 바탕 두어 진리 탐구함
    (:열매 (실) :일 (사) :구할 (구) :옳을 (시) 참된 일에서 옳은 것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