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동 국립현충원 의 유래
昌嬪安氏(창빈안씨), '동작릉'으로 이장하자 손자가 왕이 돼… 이 곳 일대 현충원으로 거듭나
정말 좋은 땅이란 있는 것일까. 길지란 어떤 곳일까. 어떻게 명당임을 알 수 있을까.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현충원의 본래 주인은 창빈안씨(昌嬪安氏)였다.
창빈은 선조 임금의 할머니이다.
그의 생전 품계는 종3품 숙용(淑容)이었으나 손자인 하성군이 임금(선조)이 된 덕분으로 정1품 빈(嬪)으로 추증된다.
원래 창빈이 1549년 51세에 죽자 양주 장흥 땅에 안장되나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이듬해 과천 동작리로 이장한다.
현재 동작동 현충원 자리이다.
동작리에 이장된 지 20년이 채 안 된 1567년 하성군이 임금이 되자 그곳이 명당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풍수설 유행에 기름을 끼얹었다. 훗날 선조 임금이 풍수설, 특히 명나라 군대와 동행하여 조선에 입국한 중국 풍수사들을 맹신하였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으리라는 추측이다.
과연 이곳은 명당이었을까.
땅의 변천사를 보면 그 답을 구할 수 있다.
원래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 왕의 사친(私親)과 세자의 무덤을 원(園), 그리고 기타 왕족과 일반인의 무덤을 묘(墓)라 부른다.
따라서 창빈의 무덤은 묘라 불러야 마땅하지만 손자가 임금이 된 덕분에 높여서 '동작릉'이라 부르게 된다.
땅에 명예가 더해진 것이다.
이곳이 좋은 터였음은 창빈 후손의 번창 여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죽은 지 130년 만에 후손은 1000여 명으로 늘어난다.
이후 조선이 망하기까지 역대 임금은 모두 창빈의 후손이었다.
위대한 화가의 눈도 이 땅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았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 18세기 중엽에 '동작진(銅雀津)'이란 화제(畵題)로 동작 마을을 그린다.
그림 속에는 멀리 관악산이 우뚝 솟아 있으며, 현재의 현충원 일대는 기와집이 늘비하게 있다.
기와집들로 보아 부자나 명문들이 살았음을 보여준다.
좌우의 산(청룡·백호)이 동작 마을을 감싸고, 그 앞으로 한강이 흐른다.
강 위에는 배가 여러 척 떠 있다.
물산이 풍부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림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을 뒤쪽 핵심처에 창빈의 무덤이 있다.
이후 동작 마을은 어떻게 되었을까?
1950년 6·25전쟁 전사자를 위한 국군묘지를 시작으로 이후 의미 확장을 거듭하여 현재의 국립현충원이 된다.
창빈의 무덤은 지금도 여전히 '동작릉'이란 이름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65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동작릉 왼쪽 100m 지점에 안장된다.
또 동작릉 뒤쪽 50m 거리에 정·관계, 문화계의 주요 인사와 장군들 묘가 들어섰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동작릉 우측에 안장되는데 불과 10m 거리이다.
고인들이 그 자리를 원했는지 아니면 후손들이 그 자리를 원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두가 동작릉 일대가 길지임을 직관하고 그 자리를 원했을 터이다.
위인들을 받아들인 그 땅의 영광이다.
또 동작릉을 에워싸고 사병·독립운동가·순직자 등 애국자들이 영면하고 있다.
대유학자이자 풍수에도 능했던 주자(朱子)는 "조상 신령이 편안함을 얻으면 그 자손이 번성하며 제사가 끊이지 않는다(神靈得安則其子孫盛而祭祀不絶)"고 하였다.
이곳에 안장된 이들의 후손들뿐만 아니라 국운의 흥성함을 가져다주는 땅이다.
특히 수양벚꽃이 만발하였을 때(4월 초) 이곳의 아름다움은 환상적이다.
또한 약수터 두 곳의 물맛은 평일에도 줄을 서서 물을 받을 정도로 일품이다.
좋은 땅의 물이니 이치상 약수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수양벚꽃 활짝 필 때 이곳을 찾는다면 참배, 명당 구경, 벚꽃놀이, 약수 맛보기 등 문자 그대로 일석사조(一石四鳥)가 될 것이다.
좋은 땅이 주는 혜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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