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흙수저니?
청춘들의 '웃픈' 자학
"집 식탁보 비닐이냐" 금·은·동·흙수저 놀이
'베테랑'선 '흙수저'의 반격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우리 시대의 새로운 문화 현상을 경쾌하게 짚는 새 기획 '트렌드+'를 시작합니다. 1300만 영화 '베테랑'부터 자학 코드인 '흙수저'까지 트렌드의 창(窓)으로 펼쳐진 2015년의 대한민국 풍경을 해석합니다.
'연립주택에 산다.'
'집에 비데가 없다.'
가로 네 칸, 세로 네 칸짜리 표 안에 하나하나씩 해당 사항에 동그라미를 그리던 청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한 줄에 동그라미 네 개가 나란히 그려진다. 빙고! 그는 '흙수저 빙고'에서 이미 한 줄을 완성했다.
최근 유행하는 이 게임은 재밌지도 웃기지도 않다. 동그라미를 많이 쳐서 빙고에 가까울수록 한국 사회에서 성공할 확률이 낮은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얘기나 다름이 없으니까.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 자신이 속한 계층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수저론'이 떠오르고 있다. 수저로 출신 환경을 빗대는 표현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다'(born with a silver spoon in mouth·부유한 가정 출신이다)는 영어 숙어에서 비롯됐다. 부모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흙 묻은 수저)다. SNS에서 떠도는 수저 기준표에 따르면 흙수저는 대학 입학 후 부모에게 경제적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거나 부모 자산이 5000만원 이하인 경우. 흙수저의 조건을 생활 밀착형 '자학 코드'로 풀어낸 게 흙수저 빙고 게임이다.
'수저론'은 '헬조선'에서 아무리 '노오~오력'을 해도 계층 간 이동이 힘들다는 열패감에서 나왔다. '헬조선'이란 취직·결혼·출산 등 안정된 생활을 위한 조건들이 보장이 되지 않는 한국 사회를, '노오~오력'은 기성세대가 신세대에게 "우리보다 좋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노력이 부족하다"고 나무라는 것을 비꼰 말이다.
취직·결혼·출산을 포기한다는 뜻의 '삼포 세대'가 자조 끝에 만들어냈다며 수저론을 무시할 건 아니다. 수저론은 흙수저를 물려준 부모가 아니라 흙수저를 한번 물면 그걸로는 영영 밥을 퍼먹기 어려운 상황을 원망하고 있다. 금·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면 걸음마를 떼자마자 영어 유치원을 다니고 사교육을 받은 뒤 명문대에 입학하고 어학연수까지 다녀온다. 금수저 중에서도 부모의 부나 지위를 이용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들어가는 혜택까지 치자면, 입에 문 흙수저는 툭 치면 산산이 부서지는 모래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취업 시장에 몰린 20대만 이렇게 느끼는 것일까? '지금 우리 사회에서 현재 본인 세대에 비해 자식 세대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올라갈 확률이 얼마나 될 것으로 생각하느냐?'는 통계청 조사에서 '매우 낮다'거나 '비교적 낮다'라고 대답한 응답자가 전 연령대에서 2006년에 비해 두 배 정도 늘었다.
수저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한들 수저를 바꿔 물거나 수저를 돌려가면서 쓰기는 어렵다. 대신 최소한의 전제는 흙수저를 쥔 이에게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정도의 '가성비' 높은 밥상이 차려져야 한다는 것.
올여름 영화 '베테랑'이 1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영화 흥행 순위 3위에 올랐다. 이 영화는 금수저보다 한 수 위인 '다이아몬드 수저'인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의 악행을 흙수저인 형사 서도철(황정민)이 응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베테랑'을 보고 나면 잊히지 않는 게 서도철의 대사,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이다. 그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조건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고 있었다. 연립주택에 살면서 집 화장실에 비데가 없는 게 '조건'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운명'이라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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