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과 당재터널
산에는 달이 머물고 폭포에는 피리소리가 스쳐갔네
[박종인의 땅의 歷史]
달이 머무는 영동과 당재터널 무명씨(無名氏)들
폐쇄된 당재터널엔 고속도로 순직자 흔적이
노론 거두 송시열은 달 머문 월류봉에서 와신상담
세조가 문수보살 만난 반야사 개울가…
악성 박연이 찾던 옥계폭포…
충북 옥천과 영동 사이 경부고속도로 공사 이야기다.
긴 터널을 뚫을 기술이 없던 때라, 산과 산 사이를 골라 굴을 뚫었다.
금강IC와 영동IC 사이는 고속도로라고 부르기에는 쑥스러운 곡선투성이였다.
1970년 고속도로 완공을 앞두고 마지막 남은 구간이 이곳 당재터널이었다.
터널 앞과 뒤를 흐르는 금강 구간에는 거대한 다리를 놓았다.
산 사이를 뚫다 보니 뚫으면 무너지고, 무너지면 사람이 죽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 기간 사고로 죽은 사람이 일흔일곱 명이었는데, 열한 명이 당재터널을 뚫다가 순직했다.
터널 개통을 끝으로 고속도로가 완공됐다.
그해 7월 7일 대구에서 열린 개통식 다음 날 대통령 박정희는 금강휴게소 옆에 있는 순직자 위령탑에 와서 조문을 했다.
2003년 잔뜩 휘어 있는 이 구간 직선화 공사가 완료됐다.
폐기된 당재터널 상행선 구간은 저온 저장고가 되었다.
한 시대 한 나라를 이끈 터널이었다.
터널을 떠받치는 아치형 콘크리트 기둥마다 현대사가 읽힌다.
대한민국 성장에 경부고속도로가 끼친 영향을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굳이 터널을 보기 위해 갈 필요도 없겠고 순직자 77명 이름이 새겨진 위령탑을 찾기 위해 일부러 금강휴게소에 정차할 이유도
없겠다.
영동을 목적지로 떠난 여행길이라면, 반드시 찾아본다.
터널이 이끄는 영동 땅 옛사람들 삶도 그러하다.
달이 머무는 황간
터널에서 30㎞ 동쪽으로 가면 영동군 황간면이 나온다.
물은 많아서 땅 이름도 누를 황(黃)에 시내 간(澗) 황간이었다.
가도 가도 첩첩산중이니, 숨어 살기에는 딱 좋은 땅이다.
농사는 거칠었고 경치는 좋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황간은 층층한 산마루를 의지하고 절벽을 굽어보고 있다.
동남쪽 모든 물이 그 아래로 꺾여 서쪽으로 가는데, 돌에 부딪히면 거문고와 비파, 피리 같은 소리가 주야로 끊어지지 않는다.
고을 서쪽 5리쯤 되는 곳에 두어 봉우리가 솟아 있고 가운데 청학굴(靑鶴窟)이 있다.
그윽하고 깊으며 연기와 안개가 아득하여 지나는 사람은 인간 세상의 경계가 아니라고 의심한다.'
승람이 '두어 봉우리'라 적은 그곳 이름은 월류봉(月留峰)이다.
달이 머문다는 뜻이다.
얼마나 아름답길래 달도 승천하지 못하고 머물렀을까.
우암 송시열과 월류봉
송시열(1607~1689)이 숨어 살 정도로 아름다웠다.
우암 송시열은 조선 중기 집권 세력인 보수파 노론의 태두였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망하고 대륙에 청나라가 섰을 때, 조선이야말로 명나라를 계승하는 소중화라 생각했던 학자였다.
1637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임금이 무릎을 꿇었다.
젊은 송시열은 외가가 있던 옥천 옆 이곳 월류봉 아래에 은둔하며 오랑캐 징벌을 꿈꿨다.
숱한 동료들이 찾아와 함께 꿈을 꾸었다.
다시 조정으로 불려 간 뒤 청나라로 끌려갔던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하자 대놓고 북벌론을 외치며 중화 부활을 이끌었다.
효종이 죽었다. 동아시아 초강대국과 맞짱을 뜨겠다는 의지는 좌절됐다.
'생활에지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혜로운 생활상식 (0) | 2017.09.15 |
---|---|
결로현상 예방법 (0) | 2017.01.26 |
피곤할 때 생기는 증상 (0) | 2016.08.11 |
보석으로 풍수·치료 (0) | 2016.07.16 |
호우경보와주의보기준 (0) | 2016.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