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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祖, 아버지 사도세자 묘 옮기는데 3년 걸린 건… 吉日을 못 잡았기 때문

호사도요 2014. 11. 24. 14:47

正祖, 아버지 사도세자 묘 옮기는데 3년 걸린 건… 吉日을 못 잡았기 때문

 

1786년은 정조에게 힘든 한 해였다.

그해 5월 유일한 혈육 문효세자가 죽었다.

같은 해 9월 14일 세자의 어머니 의빈성씨가 갑자기 죽었다.

정조에게 의빈성씨의 죽음이 충격이었던 것은 그녀가 임신 중이었기에 때문이다.

세자 죽음으로 상심하던 정조에게 그녀의 임신은 새로운 희망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죽었다.

정조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10여일 뒤인 9월 27일 정조는 고모부 박명원(화평옹주 남편)과 지관 차학모를 대동하고 아버지 사도세자 묘

(현재 휘경동 삼육의료원)를 둘러보았다. 흉지라고 확신한 그는 천릉을 결심한다.

그러나 천릉은 쉽지 않았다.

길일을 잡지 못하여 3년을 기다린 끝에 1789년 아버지 묘를 수원으로 옮긴다(현재의 융릉). 길일을 잡지 못해 이장이 취소된

사건도 있다.

1901년 고종황제는 청량리에 있던 명성황후 무덤(홍릉)을 남양주로 옮기려 하였으나 연운(年運)과 산운(山運)이 맞지 않아

천릉이 지연되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만다(1919년 고종 승하 뒤 현재 금곡 홍릉자리로 합장).

연운과 산운이란 산의 방향, 태어난 해(띠), 성씨(姓氏) 등에 따라 이장을 하기에 좋은 때를 정하는 것이다.

조선조 지관선발 서적 가운데 택일을 강조하는 책이 적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택일 방법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조선 초기 태종 임금도 세속 무당(점쟁이)들의 말에 현혹돼 2년이 지나도 장사 지내지 않는 자가 있음을 답답히 여겨 '장일통요

(葬日通要)'란 책을 펴내게 하였다.(세종 1년에 반포)

태종은 자신이 '택일을 두 번씩이나 무시했어도 아무 일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 책이 언젠가(임진왜란 때로 추정) 사라지고 다시 무당과 점쟁이들이 택일로 사람들을 혼란하게 했고, 이러한 전통은

조선 말엽까지 지속된다.

문효세자(정조의 아들)의 초장지(현재 서울 용산구 효창운동장 뒤 효창원 삼의사 무덤 자리).
          문효세자(정조의 아들)의 초장지(현재 서울 용산구 효창운동장 뒤 효창원 삼의사 무덤 자리).

1896년은 조선이 공식적으로 태양력을 채택·시행한 해이다.

그런데 같은 해 조선은 시헌력(時憲曆)이란 태음력을 간행한다.

시헌력은 본래의 기능인 달력 말고도 택일과 윤달을 말미에 붙여놓았다.

혼인·이사·집수리 등 생활 전반에 걸친 길·흉일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태양력 사용으로 인한 혼란, 특히 택일에 대한 백성들의 불안감을 해소시켜주기 위함이 그 목적이었다.

시헌력 말미에 소개된 윤달은 무엇이며 왜 윤달에 집안일을 치르는가? 음력은 양력과 달리 한 달이 29일로 1년이 355일이다

(양력은 365일). 3년이면 양력과 음력 사이에 30일 정도의 차이가 생긴다.

음력을 고수할 경우 날짜상의 계절과 실제의 계절이 어긋나게 되어 큰 혼란이 생긴다.

이를 막기 위해 3년에 한 번꼴로 한 달을 추가하여 1년을 13달로 만든다.

추가되는 달이 바로 윤달이다. 덤으로 주는 것이라 하여 '덤달', 공짜로 주는 것이라 하여 '공달'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윤달을 관장하는 귀신(鬼神)이 없다고 한다.

귀신을 흔히 '손님'이라 부르며 줄여서 '손'이라고 한다.

윤달을 주관하는 귀신이 없기에 '손이 없는 달'이 된다(손 없는 날도 같은 논리이다).

손(귀신)이 없는 달이기에 무엇을 해도 좋다는 관념에서 집안의 큰일을 치르는 것이다.

윤달에 이장과 수의 짓기 풍속이 생긴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까닭에서이다.

조선 초 태종이 부정하였던 것이 택일이다.

그럼에도 일반 백성들은 흉일이 두려워 택일을 버리지 못하였고, 조선 말엽의 조정도 시헌력을 통해서 이들의 불안을 덜어주려 한

것이다. 결국 손 없는 달(윤달)과 손 없는 날은 집안의 대사를 앞두고 알 수 없는 미래의 불안을 해소시켜주기 위한 일종의 사회적

기제(機制)였던 셈이다.

현대 풍수에서도 택일의 문제를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이런 흐름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태종의 강단 있는 태도도 우리 후손이 새겨 볼 일이다.

 

[김두규 교수 國運風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