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무주의 적상산
적상(赤裳)이라 했지요. 붉은 치마란 뜻입니다.
사면이 층암절벽으로 둘러싸인 산에 가을이 깃들면 기암과 단풍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지는데,
이 모습이 여인의 치마와 꼭 닮았다 해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전북 무주의 적상산 이야기입니다.
산 이름치고 참 낭만적입니다.
필경 단풍 곱게 든 적상산의 풍경을 묘사한 것일 테지만,
작명 당시 여성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점까지 염두에 두었던 게 분명합니다.
부드러운 산세를 더없이 잘 표현했으니 말입니다.
강원도 설악에서 시작된 단풍의 불길이 아랫녘까지 번졌습니다.
단풍의 시효라야 수일에 불과할 터. 서둘러야 나무들이 벌이는 가을 축제에 동참할 수 있겠습니다.
●아랫녘까지 번진 단풍 불길
붉은 치마 두른 산이란다.
참 로맨틱한 이름이다.
'치마만 둘렀다 하면 껄떡대는' 마초들에겐 더없이 에로틱한 산이겠다.
누가, 왜 이처럼 대담한 은유로 이름을 지었을까.
적상산엔 최영 장군의 일화가 깃든 곳이 많다.
산 이름부터 그렇다.
주민들 사이에선 고려 말 왜구 토벌에 나선 최영이 무주를 지나가는 길에 지었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전투를 눈앞에 둔 야전 사령관이 한가하게 산 이름이나 짓고 있었을까.
게다가 황금보기를 돌같이했던 무장이 단풍물든 산에서 여인의 치맛자락을 연상했다는 설정은 아무래도 무리인 듯싶다.
산에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적상산성도 고려 충민왕 때 최영의 건의로 축조됐다고 한다.
적상산 등산로의 장도(長刀)바위에 담긴 전설은 다소 황당하다.
최영의 칼질 한번에 절벽이 두 조각 났단다.
아무래도 최영의 영험함을 믿는 무속 신앙에 기댄 이야기이지 싶다.
적상산은 덕유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하지만 능선과 능선이 맞닿아 있지는 않고, 적상산 홀로 서 있는 모양새다.
명성에서도 마찬가지. 같은 국립공원이긴 하나 칭찬은 늘 덕유의 몫이었다.
겨울엔 설경에, 봄엔 철쭉에 밀렸다.
여름엔 인근의 구천동 계곡에 명소 지위를 내줬다.
그런데 가을엔 달랐다.
적상의 주름 접힌 능선들이 붉은 빛을 띠기 시작할 때면 덕유도, 구천동도 선선히 상석을 내줬다.
적상에게 가을은 반전의 계절이었던 셈이다.
적상산을 즐기는 방법은 두 가지다.
발로 걷거나 차를 타고 오른다.
대부분의 산들이 걷기 중심인 것에 견줘 적상산은 차를 타고 오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정상 근처의 안국사까지 도로가 잘 뚫려 있기 때문이다.
단풍나무들이 도로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것도 드라이브를 부추기는 요인 중 하나다.
다만 겨울철 눈이 내리면 도로가 통제되는 경우가 잦다.
미리 확인하고 출발하는 게 좋다.
●드라이브를 부르는 시오 리 단풍 치마길
단풍길은 구불구불하다.
꼭 주름 잡힌 치맛단을 보는 듯하다.
재봉선(線)처럼 가지런하다가도, 이내 마름질 선처럼 급경사를 이룬다.
정상에 이르는 6㎞ 구간 내내 그런 굽이가 31개쯤 이어진다.
이를 일러 '북창 드라이브 코스'라고 한다.
길의 들머리인 지명(북창)과 길의 기능을 섞은 단순명료한 이름이긴 하나, 길이 여행자에게 선사하는 아름다운 풍경에 견주자면 무미건조하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산길 좌우로는 단풍들이 빼곡하다.
붉은색 단풍이 많고, 샛노란 빛의 단풍나무와 신갈나무 등의 주황색 단풍들도 어우러져 있다.
딱 천자만홍(千紫萬紅)이다.
차로 적상산을 올라야 하는 이유가 이 시오 리 산길에 고스란히 펼쳐져 있는 셈이다.
적상산은 예부터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를 잇는 군사 요충지였다.
신라와 백제가 이 산을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전투를 치렀고, 왜구가 달려들었으며, 빨치산들이 은신처로 삼았다.
수차례 전쟁을 겪는 와중에 산골짜기마다 붉디붉은 피도 흘렀을 터.
적상산 단풍이 유난히 붉게 느껴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게다.
이리 휘고 저리 굽은 산길을 오르다 보면 산 중턱(850m)에서 뜻밖에 아담한 호수를 만난다.
적상호다.
1995년 양수발전을 위해 조성됐다.
호수 둘레엔 다양한 색상의 단풍나무들이 식재돼 볼거리를 더하고 있다.
호수 옆엔 원형의 수조가 서 있다.
발전을 위해 물을 가둬 두는 곳이다.
외형은 공장 건물처럼 불퉁스럽지만 적상산의 가장 빼어난 전망대 가운데 하나다.
철제 계단을 오르면 '북창 드라이브 코스'와 무주읍내, 그리고 무주 인근의 산들이 한눈에 들어 온다.
●차로 쉽게 올라 마주하기엔 미안한 풍경들
호수 갈림길에서 안국사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적상산 사고지 유구와 만난다.
조선왕조실록 등 나라의 귀중한 책들을 보관하던 장소다.
예서 다시 구불구불 산길을 5분 정도 오르면 안국사다.
절집 아래쪽 등산로는 적상산성터로 연결된다.
안국사와 철제 구조물로 차단돼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꼭 둘러보길 권한다.
복원된 산성에서 맞는 풍경이 참 빼어나다.
내친김에 안렴대(安廉臺)까지는 발품 팔아 다녀오는 게 좋겠다.
고려말 거란 침입 때 안렴사(지방 장관)가 진을치고 피란했다는 바위 절벽으로, 적상산 최고의 전망대로 꼽히는 곳이다. 적상산 최고봉인 기봉(1034m)이 출입불가 지역인 탓에 실질적인 최고봉 노릇도 겸하고 있다.
안국사에서는 500m 떨어져 있다.
일부 등산객은 안국사에서 안렴대, 향로봉(1024m)으로 이어지는 등산 코스만 다녀오기도 한다.
왕복 3㎞가 조금 넘는 거리로, 설렁설렁 걸어도 두 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안렴대에 오르면 덕유산 등 인근의 산군(山群)들은 물론 멀리 지리산까지 한눈에 담긴다.
여행수첩(지역번호 063)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경부고속도로 비룡분기점에서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 다시 산내분기점에서 통영대전 중부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무주 나들목으로 나온다.
19번 국도를 타고 무주 방향으로 가다 무주 1교차로에서 우회전해 곧장 가면 된다.
맛집
무주의 으뜸 먹거리는 금강에서 잡은 물고기로 끓여낸 어죽이다.
읍내의 금강식당(322-0979)과 내도리 뒷섬마을의 큰손식당(322-3605) 등이 이름났다.
어부의집(322-0503)은 민물고기를 삶은 육수에 국수를 끓여 낸 어탕국수가 맛있다.
잘 곳
가족 등 여럿이 함께라면 무주리조트가 좋다.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덕유산 설천봉에 오르면 불타는 듯한 단풍을 즐길 수 있다.
무주읍 당산리의 무주이리스호텔(324-3400), 설천면 삼공리의 제일산장(322-3100) 등도 깔끔하다.
(서울신문사)글 사진 무주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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