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생활

600년 한양도성

호사도요 2015. 4. 30. 13:40

600년 한양도성의 역사와 의미

 

인(仁)·의(義)·예(禮)·지(智) 담긴 사대문…성곽길 따라 '600년 도읍지'를 거닐다

 

흥인문·돈의문·숭례문·홍지문…인간이 갖출 유교의 덕목 부여
치안 목적의 '순성' 놀이문화로…풍류 즐기고 곳곳 제사도 지내
일제강점기 성벽 헐리고 훼손…근대화 과정서 옛 모습 잃기도
"1000만명이 사는 세계적 도성"…문화유산 보존 위해 복원 활발

 

서울은 조선왕조를 포함해 2000년이 넘도록 한민족이 살았던 공간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삼으면서 서울은 600년 넘게 한반도의 중심지였다.

이 중심을 아우르는 공간이자 구조물이 서울 한양도성이다.

한양도성은 삼국시대 때부터 내려온 축성 기법과 성곽 구조를 계승했다.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르며 조선의 성벽 축조 기술 변화와 발전 과정을 담고 있다.
이상해 성균관대 건축학과 명예교수는 “한양도성은 역사의 표정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교의 덕목, 공간미학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다”며 “여기에 삶과 예술 공간의 역할도 했다”고 소개한다.

조선왕조실록은 한양도성 건축사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건축 정책에 참여한 관료들이 누구였는지부터 성벽을 만들 때 쓴 돌과 나무를 어디에서 가져왔는지까지 상세하게 적었다.

개축 및 보수를 할 때면 어디를 고쳤는지, 새로 만든 것은 무엇인지도 기록했다.

성벽을 만들 때 농번기나 겨울을 피해 작업했다는 사료를 보면 백성들의 생업과 안전을 고려해 도성을 건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 사대문에는 유교의 전통 덕목인 오상(五常) 중 네 가지 덕목인 인(仁)·의(義)·예(禮)·지(智)가 차례로 적혀 있다.

 

흥인(興仁)문,

돈의(敦義)문,

숭례(崇禮)문,

홍지(弘智)문이다.

 

이 교수는 “성문이 단순히 사람이 오가는 공간뿐만 아니라 인간이 갖춰야 할 네 가지 덕목을 문에 부여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양도성 주변을 도는 순성(巡城)의 역사도 오래됐다.

처음에는 성벽을 점검하는 치안 목적이었지만 점차 성벽 주변을 따라 경치를 즐기는 유람이 유행했다.

한양도성 주변에선 사람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거나 연을 날리며 놀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도성 주변을 걸으면 한양이 한눈에 들어오고 한양을 둘러싼 산속에서 쉴 수도 있다.

단오나 사월초파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행사를 치렀다.

놀이뿐만 아니라 각종 제사도 도성 곳곳에서 지냈다.

이처럼 한양도성은 정치적, 사상적 측면은 물론 일반 사람들의 생활 깊숙이 자리했다.

 

 

한양도성은 일제강점기를 포함한 근대화 과정에서 옛 모습을 많이 잃었다. 1899년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전차가 개통되면서 성문이 제 기능을 잃었고, 1907년에는 일본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길을 넓힌다는 이유로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됐다. 이듬해인 1908년에는 평지의 성벽 대부분이 헐렸다. 성문도 헐리기 시작했다. 소의문은 1914년에 헐렸으며, 돈의문은 1915년에 건축 자재로 매각되는 운명을 맞았다. 광희문 문루는 1915년에 붕괴됐고, 혜화문은 1928년에 문루가, 1938년에 성문과 성벽 일부가 헐렸다. 일제는 1925년 남산 조선신궁과 흥인지문 옆 경성운동장을 지을 때도 주변 성벽을 헐어버리고 성돌을 석재로 썼다. 민간에서도 성벽 근처에 집을 지으며 성벽을 훼손했다. 해방 이후에도 도로·주택·공공건물·학교 등을 지으면서 성벽이 점점 훼손됐다.

정부는 1968년 숙정문 주변에서 한양도성 중건을 시작해 1974년 전 구간으로 확장됐다. 하지만 한 번 훼손된 문화재를 완벽하게 회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단절된 구간을 연결하는 데에만 치중해 오히려 주변 지형과 원래 쌓인 석재를 훼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는 한양도성의 역사성을 온전히 보존해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전승하기 위해 2012년 9월 한양도성도감을 신설했다. 2013년 10월에는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한양도성 보존·관리·활용 계획을 수립해 운영하고 있다.

 

심말숙 서울시 한양도성도감 과장은 “한양도성은 세계적으로 인구 1000만명이 사는 수도를 둘러싼 도성 중 규모면에서 가장 큰 곳”이라며 “조선 왕조 500년과 일제강점기, 근대화로 이어지는 600여년을 한민족과 함께한 역사적 유산”이라고 설명했다. 심 과장은 “한양도성은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예술 작품의 소재로 쓰이고, 순성 프로그램 등으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명소”라고 덧붙였다.

 

북악산·인왕산·남산·낙산

굽이굽이…역사의 숨결을 느끼다

 

조선 왕조 시작부터 일제 강점기, 근대화 시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600여년을 서울과 함께해 온 소중한 유산이 있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으로 주목받고 있는 한양도성이다.

서울시는 한양도성 구간을 걷기 코스로 개발해 더 많은 시민이 찾을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을 지켜온 성곽이 역사의 숨결을 느끼며 산책하기 좋은 최적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한양도성은 조선의 수도 한양을 지키기 위해 주변의 산을 따라 지은 성곽이다.

내사산(內四山)으로 불리는 4개 산인 북악산과 인왕산, 남산, 낙산으로 이어지는 도성의 둘레는 18.6㎞에 이른다.

현존하는 세계 수도 성곽 중 가장 규모가 크다.

1396년(태조 5년) 1차 완공된 한양도성은 98일 동안 19만7400여명이 동원됐다.

당시 평지는 흙을 쌓은 토성, 산지는 돌을 쌓은 석성으로 지어졌다.

세종 때 개축을 통해 토성도 점차 석성으로 바뀌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벽 일부가 무너져 내리자 숙종 때 대대적인 보수와 개축을 단행했고, 이후에도 여러 번 정비했다.

성벽을 만들 때는 돌에 기록을 남겼다.

태조와 세종 때는 구간 이름과 담당 지역을 새겼고, 숙종 이후에는 감독관, 책임기술자, 날짜 등을 명기했다.

한양도성은 일제강점기와 도시화를 거치며 훼손되기도 했지만 상당 부분이 세월을 견디고 남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북한산 일대 성곽은 도시 경관과 자연이 어우러진 독특한 모습을 자랑한다.



도심 속 힐링 공간

한양도성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인공 구조물이다.

자연을 존중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에 따라 산세에 어긋나지 않도록 자연스레 쌓았다.

이렇게 만든 성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차 자연의 일부로 자리잡았고, 문화예술의 원천이 됐다.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세계 도성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됐다.

1000만이 넘는 인구가 거주하는 대도시에서 이런 규모의 옛 성곽이 남아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훼손된 구간이 있지만, 현재는 전체의 70%가 옛 모습에 가깝게 정비됐다.

한양도성에는 사대문과 사소문이 있다. 북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숙정문 흥인지문 숭례문 돈의문이 사대문이며, 서북쪽부터 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이 사소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된 상태다.

흥인지문 남쪽에는 도성 밖 물길을 잇기 위한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있다.

한양도성은 순성(巡城)길을 따라 하루에 돌아볼 수 있다.

서울시 한양도성도감은 내사산을 중심으로 한 백악·낙산·남산(목멱산)·인왕산 구간과 도성이 멸실된 흥인지문·숭례문 구간 등 6개

구간으로 나눠 걷기를 추천하고 있다.

각 구간에 맞는 도보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간단한 준비만 하면 한양도성을 따라 걸으며 도시와 자연을 함께할 수 있다.

가벼운 산책 복장과 운동화를 준비하고 배낭 속에 간식, 물, 여벌의 옷 정도면 충분하다.

겨울에는 날씨에 따라 장갑과 방한모, 아이젠을 챙기면 된다.

백악구간의 창의문~말바위 안내소 구간은 출입제한 지역이어서 방문하려면 신분증을 출입증과 교환해야 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 중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한양도성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한양도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와 진정성, 완전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양도성은 문루와 성곽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어 축조 당시 조선시대 도성 형식의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시기별 축조 형태와 수리 기술의 역사적 증거 및 기록이 함께 남아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

한양 사람들의 삶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면서 삶의 공간 중 하나로 기능했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다.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내년 1월 세계유산센터에 한양도성 등재 신청서를 제출할 계획이다.

신청이 완료되면 내년 하반기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한양도성을

방문해 조사하게 된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등재 권고’ 판정을 내리면 이듬해인 2017년 6월 열리는 WHC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 한양도성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가 아끼고 지켜야 할 유산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낙산·흥인지문 구간 - 혜화문 ~ 흥인지문

 

낙산·흥인지문 구간은 혜화문(惠化門)에서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興仁之門)까지 이어지는 구간(3.9㎞)으로 도보 2시간 코스다.

낙산(124m)은 서울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으로 조선시대 한양을 둘러싸고 있던 4개의 산(내사산) 중 가장 낮다.

생긴 모양이 낙타 등처럼 생겨 낙타산 타락산으로도 불린다.

경사가 완만해 산책하듯 걷기에 적당하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4번 출구에서 올라와 가톨릭대 뒷길을 걷다 보면 축조 시기에 따라 성돌의 모양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볼 수 있다. 가파른 언덕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과 마을에 그려진 벽화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톨릭대 뒷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낙산공원 동남쪽 성벽을 끼고 있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6·25 전쟁 이후 형성된 판자촌으로, 60세 이상의 노인 거주 인구가 많아 ‘장수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재개발 대신 마을 주민들이 직접 나서 집을 단장하고 골목길을 정비해 주민 참여형 마을재생사업의 성공적 사례로 꼽힌다.

장수마을에서 도성 안으로 들어가면 낙산공원 놀이마당이 나온다.

서울의 몽마르트라 불릴 정도로 전망이 좋다.

성곽 길을 따라 빛나는 도심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노을 질 무렵이나 야간에 올라가는 것을 추천한다.

낙산 구간 성벽 바로 안쪽에는 이화마을이 있다.

2006년부터 정부 지원으로 예술가들이 건물 외벽과 계단에 그림을 그리고 빈터에 조형물을 설치하면서 마을 이미지가 밝게

바뀌었다. 벽화와 어우러진 옛 마을의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낙산 성벽 바깥쪽 창신동 일대는 조선시대에 퇴직한 궁녀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다.

1960년대 이후에는 동대문시장에 의류를 납품하는 하도급업체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한국 봉제산업의 중심지가 됐다.

이 동네에는 높이 40m, 길이 201m의 깎아지른 듯한 돌산 절벽이 있다. 대한제국 때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채석장으로 쓰인 곳이다.

 

성곽길을 따라 한 시간 정도 걷다 보면 한양도성의 동대문인 흥인지문에 도착한다.

지금의 흥인지문은 고종 6년(1869년) 다시 지은 것으로, 조선 후기 건축의 특성이 잘 드러나 있어 보물 제1호로 지정됐다.

옛 수문이 있던 오간수문 터와 이간수문을 거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지나면 광희문(光熙門)이 나온다.

광희문 성벽을 따라 장충동 주택가로 들어서면 한양도성은 다시 자취를 감춘다. 성돌은 주택의 담장이나 축대로 사용되고 있다.

 

 

 

백악 구간 - 창의문 ~ 혜화문

 

백악 구간은 창의문(彰義門)에서 백악을 넘어 혜화문(惠化門)에 이르는 구간(4.7㎞)으로, 도보 3시간 코스다.

삼청각 북촌 등이 가까이 있어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좋다. 윤동주 한용운 이태준 김광섭 등 문인들의 발자취도 느낄 수 있다.

백악(북악산·342m)은 한양의 주산(主山)으로 내사산 중 가장 높다.

1968년 1월21일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침투한 뒤 40년 가까이 출입이 제한되다 2007년 개방됐다.

창의문·숙정문·말바위 안내소에 입장할 때는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백악 구간은 인왕산과 백악이 만나는 지점인 창의문(자하문)에서 시작한다.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버스를 타고 자하문 고개에서 내리면 창의문에 도착한다.

창의문 안쪽에는 최규식 동산, 윤동주 문학관을 만날 수 있고 바깥쪽 서울미술관 안에는 석파정이 있다.

석파정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이 있던 곳이다. 석파(石坡)는 흥선대원군의 호다.

창의문에서 산성을 따라 걷다 보면 ‘백악산 해발 342m’라고 적힌 표석이 나온다.

도성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백악마루다.

이곳에 서면 경복궁과 세종로는 물론 한강 건너 63빌딩까지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백악마루에서 청운대로 내려가는 길에는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있는 큰 소나무를 만나게 된다.

청와대를 습격하려 침투한 북한 특수대원들과 우리 군경이 교전한 흔적이다.

백악 구간을 반쯤 걸으면 한양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이 있다.

숙정문은 가뭄이 심할 때를 제외하고는 늘 닫아두었다고 한다.

북쪽에서 ‘음기’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숙정문을 열어두면 장안 여자들이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아 두게 했다”는 속설도 전해진다.

숙정문 밖에는 야경이 아름다운 삼청각이 있고, 삼청공원 쪽으로 내려가면 북촌 한옥마을을 둘러볼 수 있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마을을 지칭하던 옛 이름으로 지금은 재동 가회동 계동 삼청동 일대에 해당한다.

와룡공원 옆으로 도성 안쪽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성북동으로 빠지는 문이 나온다.

문 밖에 그림처럼 펼쳐진 마을이 북정마을이다.

한용운 선생이 살던 ‘심우장’과 ‘성북동 비둘기’를 쓴 김광섭 시인의 옛 집이 남아있다.

국내 최초의 사립 미술관으로 훈민정음 해례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국보급 문화재와 국내 최고 수준의 서화를 소장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이 북정마을 끝에 있다. 한양도성의 동북문인 혜화문에서 백악구간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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